김종영

우성(又誠) 김종영(金鍾瑛)은 1915년 6월 26일 경상남도 창원군 소답리(召沓里) 111번지에서 부친 김기호(金其鎬)와 모친 이정실(李井實)의 사이에서 오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서화(詩書畵)에 능통했던 부친으로부터 전형적인 동양의 사대부 교육을 받고 향리에서 소학교를 마친 그는, 1930년 서울 휘문학교에 입학하여 훗날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을 지내게 되는 장발(張勃)을 은사로 만났고, 이쾌대(李快大), 윤승욱(尹承旭) 등과 함께 수학했다. 십팔 세 때인 1932년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전국학생서예실기대회’에서 안진경체(顔眞卿體)로 일등상을 수상하면서 일찍이 뛰어난 예술적 품성을 드러냈다.

예술에 이해가 깊었던 부친의 후원 아래 은사 장발의 권유로 1936년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진학하여 조각을 전공하게 된 그는, 1941년 졸업 후에도 연구과(대학원 과정)에 머물면서 제작생활에 몰두하였으며, 아사쿠라 후미오(朝倉文夫), 다데하다 다이무(建?大夢) 등에게 사사하였으나, 화집을 통해 콜베, 자킨, 부르델, 마욜, 브랑쿠시 등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오 년간 고향인 창원에 묻혀 은둔생활을 하다가, 1948년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이었던 장발의 요청으로 김용준(金瑢俊), 장우성(張遇聖), 김환기(金煥基) 등 당대의 뛰어난 미술가들과 함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되었고, 이후 1980년 정년퇴임하기까지 오로지 작품활동과 미술교육에만 전념하였다.

1953년 봄, 김종영은 영국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서 주최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국제조각대회에 출품하여 입상하면서 비로소 조각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59년 장우성과의 이인전에서 작가로서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한자리에 선보였다. 한편, 경북 포항에 세운 <전몰학생기념탑>(1957), 서울대 음악대학에 세운 <현제명 선생상>(1960), 서울 탑골공원에 세워진 <3·1 독립선언기념탑>(1963) 등 기념비적인 조형물들도 많이 남겼으며, 서울대 미술대학장, 국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을 역임하면서 독립선언기념탑>한국 조각계 발전에 헌신하였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지만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절제하여, 1975년 신세계미술관에서의 회갑기념 개인전과 1980년 서울대 정년퇴임 기념 현대미술관 초대전 등 단 두 차례의 개인전과 선별된 그룹전을 통해서만 작품을 발표하였다. 또한 조각작품뿐 아니라 삼천여 점의 소묘작품과 팔백여 점의 서예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그의 추상소묘는 추상조각작품이 탄생하게 된 밑그림으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조형세계를 반추해 가며 ‘절대의 미’를 추구한 한 예술가의 뛰어난 사유의 진행을 보여준다.

한국현대미술의 발전과 후학 양성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은 그에게 1974년 ‘국민훈장 동백장’이 서훈되었고, 1978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이 수여되었다. 그는 일 년간 병마와 싸우던 끝에 1982년 12월 15일 육십팔 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1983년 그의 일 주기를 기해 유고집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가 열화당에서 출간되었다. 1989년에는 유족, 제자, 후학들의 발의로, 김종영의 뜻과 가르침을 오늘에 되새기기 위해 ‘우성 김종영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으며, 그 해 호암갤러리에서는 초대 회고전이 열렸다. 199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우성 김종영 조각상’이 제정되었고, 1992년 십 주기 추모전이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다. 2002년 김종영미술관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