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미술대요

1949년에 출간되었던 근원 김용준의 『조선미술대요』를 내용의 정확성을 기하여 새롭게 복간했다. 조선미술의 발생에서 낙랑미술의 시비를 다룬 「삼국 이전의 미술」부터 일제 강점기의 「암흑시대의 미술」까지 우리나라 미술의 역사와 각 시대의 성격, 특징 등을 해당 시대의 작품과 함께 자세하게 다루었다.

이 책 『조선미술대요』는 ‘근원 김용준 전집’의 둘째권으로, 1949년에 출간되었던 초판본을 기초로 하여 출간 당시의 원문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내용에 정확성을 기하고 편집의 묘미를 살려 완성도를 높인 복간본이다.
『조선미술대요』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조선미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나가고 싶어했던 한 예술가의 기록이다. 무엇보다도 근원의 업적은 20세기 한국미술사를 처음으로 대중화한 데서 찾을 수 있는데, 이 책의 알맹이라 할 시대별 국가별 미술 특색이 당시 미술 교과서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초등학교 때부터 외우다시피 국민들 사이에 새겨졌던 것이다. 또한 이 책은 근원의 통찰력과 감상안, 심미안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는 꼼꼼한 사실관계 서술을 안으로 채우면서도, 설득력 넘치는 글솜씨로써 정연한 논리를 감성으로 풀어 놓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실증주의 사학은 물론, 사회경제사학, 비교미술사학, 심리 및 사상사를 아우르는 종합방법론을 취하고 있지만, 일반인들 누구나 읽고 배울 수 있을 만큼 평이하게 서술한 것이 두드러진다.

아름다움의 발견 - 해제로 읽는 『조선미술대요』/ 미술평론가 최열

김용준(金瑢俊, 1904-1967) 선생은 20세기 화단을 수놓은 뛰어난 화가로서 비평과 사학을 겸전한 재사였다. 문사철(文史哲) 겸전의 지성을 들라면 단연 선생을 손꼽을 수 있을 정도인데, 이를테면, 창작에서 〈춤〉, 문학에서 『근원수필(近園隨筆)』, 사학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만으로도 이미 선생은 존경받아 마땅한 자리에 있다 할 것이다.
경북 선산(善山)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뛰어난 재주를 후원한 이들에 힘입어 어느덧 동경미술학교 유학을 떠나기에 이르렀다. 빛나는 재주로 시대사상을 섭렵하여 한 시대를 풍미한 선생은 상고주의(尙古主義)를 자기 것으로 여겨 서화골동취미를 한껏 뽐내며 조선미술사와 수묵채색으로 전공을 옮기는 한켠에 신세대 화단을 주도하는가 하면, 날카로운 비평으로 일세를 흔들었다.
그러던 선생이 성북동과 의정부에 은거하듯 선부(善夫)와 우산(牛山)을 자처하며 전통에 탐닉해, 비로소 해방 뒤 우리 미술사상 아름다운 열매인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를 완성했다. 이 열매는 드문 것으로 누구나 단숨에 읽어내릴 수 있을 만큼 유려한 글솜씨를 감추고 있으니, 나는 문득 부럽다는 말을 떠올리곤 한다.
선생의 『조선미술대요』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다. 미술사 지식을 담은 그릇도 아니다. 『대요』는 조선미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나가고 싶어했던 한 예술가의 기록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미술의 특징을 찾아 나섰다. 고유섭(高裕燮) 선생을 비롯해 후학들의 발자취가 구비구비마다 비슷비슷한 꽃들이 피웠거니와, 내가 보기에 선생만큼 맑고 담백한 향기를 풍기는 꽃은 흔치 않다.
무엇보다도 문장의 유연함과 유장함이 으뜸이다. 탄력과 깊이, 게다가 긴 숨결이 읽는 이를 붙잡아 빠져 나오기 힘든 매력이 있다. 얼핏 전문 낱말로 가득찬 지식을 늘어 둔 것처럼 딱딱해 보이지만, 줄마다 스며들어 있는 맛깔스러움이 일품이다. 그것은 아마 스스로 고백하듯 “내가 보고 느낀 대로 이야기하듯 기록해 본 것”이기 때문일 게다.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진솔한 내면의 기록으로서 미술사는 그처럼 천연스레 탄생했던 것이다.
조선미술사는 일본 사람들이 조사, 연구, 정리를 해 체계를 세우다시피 했다. 그들의 조선미술사는 멋대로 꾸민 아전인수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꾸며 놓으려 하다 보니 모순에 찬 결과로 가득 차 신용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선생은 그 점을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수치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고 했다.
그래서 선생은 평양이 중국 한(漢)나라 식민지라는 일본인들의 학설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같은 태도는 『대요』 전편에 일관성있게 흐르고 있거니와, 다만 조선시대 미술의 쇠퇴론은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조선시대 미술에 관한 조사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조건이었고, 또한 일본인들이 스스로 식민지 점령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역사쇠퇴론을 끊임없이 적용했던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같은 흠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안목은 아주 뛰어났다. 선생은 양식과 특색을 논할 때면 언제나 그 원인을 아주 또렷하게 밝혀 두곤 했다. 이를테면 귀족스런 고려자기와 평민스런 조선자기를 빗대면서 시대상황, 종교사상, 제작조건 따위를 아우르면서 증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선생의 업적은 20세기 우리 미술사를 대중화한 데 있다 하겠다. 선생이 쓴 『대요』의 알맹이라 할 시대별, 국가별 미술 특색이 고스란히 미술 교과서에 반영되어 초등학교 때부터 외우다시피 국민들 사이에 새겨졌던 것이다. 물론, 고유섭 선생도 그같은 특색을 새겨 놓았는데, 다만 김용준 선생의 그것이 명쾌하기 그지없어, 표현 그대로 교과서에 스며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고구려 사람도 강한 성질이요 신라 사람도 강한 성질이나 고구려미술의 특징은 북방적인 웅혼하고 씩씩하고 규모가 크나 그 반면으로 거칠며, 신라미술의 특징은 웅혼하기보다 장엄하고, 씩씩하기보다 건강하며, 규모가 크기보다 잘 정리 조화를 시키며, 거칠기보다 부드러운 것이 특색”이라고 표현했는데, 알맹이를 드러냄이 참으로 시원하다. 백제미술의 특색에 대하여서도 ‘따뜻하고 침착한 성격의 백제 사람들이 그 세련되고 정교하고 아윤(雅潤)한 솜씨로 말미암아 온아 유려한 미술’을 아로새겼다고 했다. 그뿐이 아니다. 신라 사람들이 ‘돌을 만지기를 떡 주무르듯 하고 돌을 사랑하기를 우리가 화초 기르듯 한 것 같다’고 쓴 대목에 이르면 미술사 서술이 이같을 수도 있음에 탄식이 그치질 않는다.
선생은 고려미술에 이르러서도 그 빛나는 눈길을 멈추지 않는다. 시대양식을 헤아렸던 선생은 고려미술에서 귀족의 섬약함을 지적하면서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누구도 표현하지 못했던 서술에 이르렀다. “경쾌하면서도 도타운 맛, 화려하면서도 청초한 맛, 작은 규모이면서도 아담한 맛, 멀리 놓고서 바라다보고 싶기보다 손에 들고 어루만져 보고 싶은 맛”이라고 그렸던 것이다. 밝은 눈은 빛발을 뿌리는 법이다. 선생은 그 맛을 독특한 ‘로컬 컬러(향토색)’라고 규정하고 나섰다. 고려미술의 로컬 컬러 구현은 ‘필경 고려자기에서 완성되고 조선시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가장 순수한 조선적인 새로운 전통을 창출하고야 만 것’이라고 쓴 대목은 선생의 빼어난 안목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드러내지 못할 비밀이었을 터이다.
더구나 선생은 고려미술에서 ‘가냘픈 곡선, 불안정한 형태, 은은한 색조 표현’을 들어 거기서 ‘비극의 미’를 발견했다. 선생은 조선미술에서 건실한 평민의 미, 순진하고 어수룩한 소박한 미를 느낀다면서 “얕고 고운 표면의 미가 아니요, 숨은 선비(隱士)를 대하는 듯한 깊이있는 미”라고 썼다. 이미 시대가 내려올수록 쇠퇴했다고 하는 일제 식민 미술사학의 영향을 짙게 받은 터에 선생 또한 조선시대의 미술에 대해 ‘다소 손색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하면서도 극복의 의욕을 꺾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조선시대의 미술이 시대적으로 우리와 같은 감정을 전해 준다면서 조선미술의 ‘근대적 감각의 강렬함’을 내세웠던 것이다.
이처럼 선생의 미술사학은 아름다움을 발견해 나가는 그릇이자 단순한 지식 모음이 아니라 통찰력으로 넘치는 샘터였다. 내가 보기에 선생이 그같이 풀어 나갈 수 있었던 힘은 다음 같은 국가, 민족, 지리, 성격, 시대 양식론을 아우르고 있었던 데 있었다.

“미술은 국가마다 그 특색을 달리하고, 민족마다 그 특색을 달리한다. 더 세분해 보면, 한 나라 한 민족의 미술로서도 남방과 북방의 미술이 다르고 갑과 을의 작품이 또 다르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지리적으로 성격적으로 각각 다른 미술은 시대적으로도 각각 다르다.”

그러나 나는 선생의 한계이자 시대의 한계를 한 가지 짚어 두려 한다. 먼저 시대의 한계는, 선생의 연구 이후에 이루어진 새로운 발굴과 조사로 말미암아 사실관계의 잘못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대세에는 지장이 없으므로 전문가가 아닌 바엔 덮고 지나칠 일이다. 다음, 시대의 한계이자 선생의 한계이기도 하거니와 조선시대 회화에 대한 완연한 왜곡이다. 특히 조선시대 말기의 화가들에 대해 ‘한결같이 화보 모방주의를 버리지 못한 탓으로 조선화에 독특한 발전을 보이지 못한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는 대목은 연구가 낙후했던 시대를 거울처럼 비추는 것이다.
끝으로 『대요』에서 빛나는 열매는 제6장 「암흑시대의 미술」이다. 하나의 장으로 자리매김하여 당대를 역사화했다는 점은 이미 1946년과 1948년 4월에 나온 윤희순(尹喜淳)의 『조선미술사 연구』와 김영기(金永基)의 『조선미술사』에서 구현했으므로 새로운 시대구분이랄 수는 없다. 오히려 김영기는 ‘근대 조선의 화단’이라 이르고 있으니, 시대구분에선 보다 앞선다 할 것이다. 또한 윤희순은 아예 그 시대의 미술이 남긴 것들을 잔재라 하여 일본색의 침투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대한 김용준의 열매는 무엇인가. 다름 아닌 각 분야에 따른 갈래와 가지를 또렷하게 드러낸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수묵채색화 분야에서 첫째, 재래의 화풍 계승 경향, 둘째, 절충 화풍 및 일본화풍 경향으로 나누었고, 특히 서예의 흐름까지 아울렀다. 또 유채화 분야에서 매우 다양한 화풍을 거론하고 있으며, 남달리 조소예술 분야와 석탑 그리고 공예 분야까지 확장시켜냈다. 이처럼 역사의 흐름을 분류하고 체계화한 데서 『대요』의 값어치를 헤아릴 수 있거니와, 그의 엄격하고 충실한 헤아림, 당대 미술의 핵심을 드러내는 통찰력, 뿐만 아니라 문장의 유장한 숨결은 미술사의 명저가 무엇인지 알려 주는 것이다.
『대요』는 지식을 전달하는 창고 따위가 아니다. 선생의 통찰력과 감상안, 심미안으로 가득찬 비밀의 정원이다. 게다가 꼼꼼한 사실관계 서술을 안으로 채우면서도 설득력 넘치는 글솜씨야말로 정연한 논리를 감성으로 풀어 놓았기 때문일 터이다. 선생은 여기서 실증주의 사학은 물론, 사회경제사학, 비교미술사학, 심리 및 사상사를 아우르는 종합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 국민 누구나 읽고 배울 수 있을 만큼 어려운 내용을 평이하게 서술하였던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무슨 시험문제 풀듯 단순한 지식으로 무장하고 싶은 사람은 『대요』를 읽을 필요가 없다. 오직 ‘우리가 보고 느끼는 미술품이 왜 아름다우며 어떠한 환경에서 그렇게 만들어졌는가’를 헤아리고자 할 때, 그때 김용준 선생과 이야기를 시작할 일이다.
그래서 해 두는 말이 있는데, 꼭 선생의 『근원수필』을 포개어 읽을 일이다. 20세기가 낳은 수필문학의 진수이기도 하거니와 선생의 여유로움, 선생의 담백함, 자연과 고전을 대하는 선생의 참된 마음가짐을 깨우침으로써 우리 미술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로 솟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덧붙여 둘 것이 있다. 선생이 북으로 올라가 쌓아 올린 미술사학의 업적이 그것인데, 이미 『대요』에서 밝힌 대로 고적 답사와 유물 실견이 부족한 처지를 완연 극복한 조건에서 이룬 성과들이 즐비하다. 선생은 1953년까지 재직하던 평양미술대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1955년까지 과학원 고고학연구소로 옮겨 미술사 연구를 본격화했다. 그 뒤 복직하고서도 미술사 연구를 지속하면서 1956년부터는 고분벽화 현지조사를 시작했으며 1958년에 비로소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를 출간했던 것이다.
선생은 1956년에 리여성이 『조선미술사 개요』를 출간하자 이에 대해 수차례 그 오류를 지적하는 사학자의 날카로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같은 열정은 북한 미술사학계만이 아니라 미술계의 창작에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를테면 『조선화기법』과 같은 저술을 발표하고 또한 대학 일선에서 그것을 고스란히 교육해 나갔다. 다시 말해 선생은 미술사 연구 결과를 자신의 시대에 계승, 혁신시켜 나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사학과 창작을 겸전한 선생의 탁월함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20세기에 드문 일이라 하겠다.
조선미술가동맹 평론분과위원장 리재현이 지은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 따르면 선생은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평양미술대학 예술학 부교수로 재직했다. 새로운 모습으로 어여쁘게 꾸며 『조선미술대요』를 다시 엮어내는 마당에 선생의 삶이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빛났음을 새길 수 있음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이제 남은 욕심을 말하자면 거기 어딘가에 있을 선생의 저서 『조선미술사』와 『단원 김홍도』와 마주치길 바란다는 것이다. 어쩌면 남북정상회담의 열매가 그 꿈 같은 날을 앞당겨 줄지도 모르겠다.

『조선미술대요』 발간에 부쳐

『조선미술대요』는 ‘우리 문화예술론의 선구자들’을 기획하면서 그 첫번째 작업으로 선보이는 ‘근원 김용준 전집’의 둘째권이다.‘우리 문화예술론의 선구자들’은 우리 문화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준거를 마련했던 선학들의 학문적 성과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사료적 가치를 온전히 오늘에 되살리고, 그 속에 깃들인, 제대로 사고하고 제대로 쓸 줄 알았으며 바르게 학문했던 인문정신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학문적 문화적 사표(師表)로 삼고자 기획되었다.

오늘 우리는 아무런 여과 없이 횡행하는 수많은 매체에 길들여져 난삽한 글쓰기와 글읽기를 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 문화전통의 실질적 토대가 되는 우리의 언어와 표현 그리고 학문탐구의 방법은 날로 부박해지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문화전통이 극도로 혼란한 때에, 뛰어난 선학의 글을 읽고 배우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풍요로운 일일 뿐만 아니라, 간결 담백 호방한 우리 언어의 참맛과 풍부한 교양 그리고 격조 높은 인문정신을 체득하게 해 준다. 이와 같이 존경스러운 선학의 글을 통해 단절되어 가는 우리 문화의 줄기를 다시 잇고, 가벼워져 가는 인문학의 행태를 각성시켜 우리 본연의 문화전통을 되찾으려는 데 이 총서 발간의 의의를 두고자 한다.

시리즈의 첫 인물로 미술사학자 근원 김용준을 선정했고, 그의 저서와 논문을 포함한 여러 글들을 모아 ‘근원 김용준 전집’을 다섯 권으로 구성했다. 제1권 『새 근원수필』과 제2권 『조선미술대요』를 시작으로 하여, 조선회화에 관한 글들을 모은 제3권 『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 1958년 북에서 출간된 것을 새롭게 편집·복간한 제4권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그리고 근원의 미술관련 글과 기타 산문을 모은 제5권 『근원의 미술산문』(가제)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 『조선미술대요』는 1949년 초판본을 기초로 했고, 출간 당시의 원문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내용에 정확성을 기하고 편집의 묘미를 살려 완성도를 높였다. 한글세대의 독서감각에 맞도록 원본의 한자 노출을 한자 병기로 바꾸었고, 인명과 지명은 현행 외래어표기법에 맞게 바꾸었으나, 중국의 인명과 지명은 한자음 그대로 표기했다. 원문의 각 장마다의 미주는 가독성을 고려하여 각주로 바꾸었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따로 ‘이 책을 읽는 사전’식의 편자주 137개를 ‘ ’표로 구별하여 달았다.

‘이조’ ‘이씨조’ 등의 표현은 문맥에 따라 ‘조선조’ ‘조선왕조’ ‘조선시대’ 등으로 바꾸어 표기했고, 본문 중 ‘강고내미(强古乃未)’와 ‘이산뢰상(李山賚像)’은 각각 ‘강고내말(强古乃末)’과 ‘이채상(李采像)’으로 바로잡았으며, 집필 당시에 작고한 분들의 이름 앞에 표기한 ‘고(故)’자는 문맥과 가독성을 고려하여 삭제했다. 유물의 소장처가 바뀐 경우와 1949년 이후 학계의 성과로 명백히 오류로 밝혀진 서술의 경우 그리고 유물의 명칭이 바뀐 경우는 이 책이 지닌 사료적 가치를 고려하여 바로잡지 않았다. 원본의 도판과 삽도는 가능한 한 최근의 것으로 바꾸어 실었는데, 원본의 도판 185컷 중 그 동안 유물이 산실되어 도판을 구할 수 없는 경우와 비슷한 도판이 중복된 경우 그리고 내용과 어긋나는 도판이 수록되어 있는 경우 등은 제외시켜 모두 180컷을 실었다.

소장처가 ‘덕수궁미술관’과 ‘덕수궁박물관’으로 되어 있는 유물들은 일부 산실된 유물을 제외하고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

이 책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미술평론가 최열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자료를 제공해 주신 웅진출판사 윤석금 회장님, 이화여대 강우방 석좌교수님, 국립중앙박물관 이원복 미술부장님 그리고 그 밖에 많은 도움을 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올해는 근원 김용준 선생이 돌아가신 지 33년, 남과 북이 갈라져 살아온 지 55년째 되는 해이다. 근원 선생은 돌아가셨고 선생의 유가족을 찾을 길이 없으니, ‘전집’ 출간을 눈앞에 두고 안타까운 심정 금할 길 없다. 남북관계가 호전되어 선생이 살아온 발자취가 선명하게 드러날 날을 기대한다.

2000년 9월
편집자

김용준 (저자)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은 경북 선산(善山) 출생의 동양화가이자 미술평론가·한국미술사학자·수필가·교육자·장정가로, 호는 근원(近園)·검려(黔驢)·우산(牛山)·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벽루산인(碧樓山人)·반야초당주인(半野草堂主人)·매정(梅丁) 등이다.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 후 중앙고보와 보성고보 미술교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동양화과 교수를 역임했고, 동국대 사학과에서 미술사를 가르쳤다. 1950년 9월 월북하여 평양미술대학 교수,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 위원장, 조선건축가동맹 중앙위원, 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평양미술대학 조선화 강좌장 등으로 활동했다. 저서로 『근원수필』(1948), 『조선미술대요』(1949),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1958) 등이 있으며, 다수의 미술평론 및 미술사 논문을 발표했다.

『朝鮮美術大要』 발간에 부쳐 / 편집자
아름다움의 발견-解題 / 최열

자서(自序)
범례(凡例)
서론(緖論)

1. 삼국 이전의 미술 : 조선미술의 발생에서 낙랑미술(樂浪美術) 시비까지

2. 삼국시대의 미술 : 삼국시대 미술 개관

1. 고구려의 미술-패기(覇氣)로 일관된 고구려의 미술

1. 고분(古墳)과 벽화(壁畵)
2. 고구려의 불상조각(佛像彫刻)

2. 백제의 미술-남국정조(南國情操)의 백제미술

1. 사치를 극(極)한 백제건축
2. 탑파(塔婆)의 선구
3. 백제불상의 특징
4. 백제의 회화

3. 고신라(古新羅)의 미술-금철공예(金鐵工藝)로 이름높은 고신라

1. 불교건축과 황룡사의 규모
2. 모전탑(模塼塔)의 창시
3. 불상조각의 발달
4. 고신라의 회화와 화성(畵聖) 솔거(率居)
5. 찬란한 금철공예

3. 신라통일시대의 미술 : 백화난만(百花爛漫)한 불교미술의 황금시대

1. 원지(苑池)와 건축
2. 석조탑파의 최고봉
3. 동양조각의 정수
4. 회화유적(繪畵遺蹟)의 인멸(湮滅)과 김생(金生)의 서(書)
5. 신라의 공예

4. 고려시대의 미술 : 불교미술의 여성시대(餘盛時代)

1. 고려의 건축과 부석사
2. 우미(優美)한 탑파와 부도
3. 여대(麗代)의 불교조각
4. 고려의 서화
5. 세계적으로 독보한 고려공예

5. 조선시대의 미술 유교정책으로 변화되는 미술

1. 조선시대의 건축
2. 최후의 탑파
3. 불상조각의 쇠퇴
4. 회화의 남북종과 서도
5. 향토색이 농후한 공예

6. 암흑시대의 미술 국권의 상실과 말살당한 문화

김용준 연보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