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상과 사상

1953년 하버드 대학 강연에서 허버트 리드가 제시한 명제 “이미지(icon)는 인간의식의 발전에서 언제나 사상(idea)에 선행한다”는, 시각예술이 정신의 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언제나 정신보다 앞서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구석기시대부터 현대 추상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훑어 나가며 이 명제를 증명해내고 있다. 이는 난해한 현대미술의 미학과 미의식의 진화과정, 이미지와 의식 간의 긴장이 어떻게 예술적 창조로 이어지게 되는가 하는 과정에 대한 단서를 던져 준다.

새로운 미술론 혹은 인식론의 등장

1953년, 하버드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허버트 리드는 야심적이고 혁명적이랄 수 있는 주제와 관점을 제시한다. “이미지(icon)는 인간의식의 발전에서 언제나 사상(idea)에 선행한다”는 명제가 그것으로, 시각예술이 정신의 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언제나 정신보다 한 발짝 앞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책 『도상과 사상(Icon and Idea)』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씌어졌다.

그는 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인류 문화의 시작점인 구석기시대부터 현대의 추상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훑어 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이제껏 당연시되어 오던 ‘정신사로서의 미술사’, 즉 인간의식 혹은 사상 발전의 역사로서의 미술사라는 생각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미술사로서의 정신사’를 구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미술사로서의 정신사’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미학에 대한 관념과 미술사를 재편하고 근본적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 인식전환에 대한 요구는 종래 이성적이고 언어 중심적인 문화를 보는 시각에 종속되어 있던 ‘감수성’을 끌어내는 것으로 새로운 인식론이랄 수도 있는 것이며, 미술의 사회적 기능을 최대한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이 책의 구성과 특징

허버트 리드는 이 책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명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를 ‘최초로 미술가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던 것은 철학자에 의해 생각될 수 없다’는 의미로 참조한다. 논리적 전개방식으로는 헤겔의 변증법, 융의 아키타입 개념, 카시러의 상징적 형식 등을 적절히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는 미술의 역사를 일곱 단계로 나누고, 그 각각의 시대가 독자적인 미학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 원시적인 사고체계에서 서투른 모방을 하다가 원근법의 발명으로 점차 정확한 재현을 꾀하게 된다는 식의, 인간의 지적 능력 성장을 따라 미술이 종속적으로 발전한다는 종래 관념에 반하는 것이다.

제1장 ‘생명의 이미지’에서는 동굴벽화의 자연주의적 묘사를 생명주의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이에 상상 혹은 토템으로서의 이미지의 효능과의 연관성이 나타나 주술관념이 생겨났다고 보고 있다. 여기까지가 구석기시대 인간이 이룩한 표현방식으로, 이때부터 ‘생명성’이란 미적 자질이 등장한다.

제2장 ‘아름다움의 발견’은 신석기시대와 고대 왕조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이 시기 들어 바구니를 짜거나 토기를 제작하는 반복적 동작과 그 문양에서 도출된 추상이란 관념을 통해 기하학적 양식이 등장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구석기시대와의 단절이 아니며, 기존의 자연주의적 미술이 변용된 것으로 봄으로써 각 시대별로 등장한 미적 가치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각 시대의 긴밀한 상호 연관성을 드러내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이때 나타난 기하학적 문양패턴은 균형, 대칭 등의 원칙을 만들어내어, 생명성과 구별되는 새로운 미적 자질인 ‘아름다움’이 등장한다. 이러한 시각은 점차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다는 식의 종속적 관점 혹은 서로 다른 원칙들의 대립으로 미술사를 바라보던 관점을 지양하는 것으로, 이는 다음 시대에도 생명성과 아름다움이라는 두 개념이 혼융되기도 하고, 나란히 병행하기도 하면서 지속되고 있는 양상에서도 볼 수 있다.

제3장 ‘미지의 것에 대한 상징’에서는 고딕 성당을 통해 인간이 ‘돔’과 같은 보이지 않는 현존을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듦으로써 주술적 세계에서 벗어나 ‘초월적 종교’라는 상징을 창조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가 전제로서 참조한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형상에서 사상으로, 그리고 다시 그 사상을 받아들여 형상이 더욱 정교화하고 확산되어 보다 진전된 사상을 창조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4장 ‘이상으로서의 인간’은 그리스 조각상을 통해 근육의 표현에서는 생명성이, 옷주름의 표현에서는 기하학적 양식에서 발달한 아름다움이 나타나고, 이 종합으로 이상적 인간상, 인간적 이상주의 철학이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생명 이미지의 조화화’로서 실재에 대한 의식을 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제5장 ‘실재의 환상’에서는 앞서 언급된 실재감을 르네상스를 통해 보다 심화시키고 있다. 즉, 원근법에 의해 실재 공간이란 개념이 생겨나고 그것을 실증적이고 측정 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실재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곧바로 원근법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환영주의 미술의 폐해를 경고했고, 이후 사백 년간의 미술을 쇠퇴한 것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장의 말미에서 원근법을 통한 상상력과 사고의 무한한 세련화 뒤의 쇠퇴기에서 의식 자체의 실재, 즉 주관적 실재를 드러내려는 무의식의 의식이 태어났다고 끝맺음으로써 제6장과 제7장에서 전개될 두 갈래의 현대미술 양상을 예고한다.

제6장 ‘자아의 개척’에서 허버트 리드는 융의 페르소나 개념을 차용하여, 다 빈치의 자화상에서 앵포르멜, 추상표현주의 미술로 나아가면서 점차 견고한 페르소나가 해체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캔버스에 나타나는 순간 소통되고 통제받지 않으며 자아의 비밀을 드러내는 데 이른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미적 자질로 언급했던 생명성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며, 점차 밝혀지기 시작하는 인간의식의 보다 넓은 스펙트럼, 무의식의 깊은 심연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제7장 ‘구성적 이미지’는 생명성보다 조화의 이미지로 세잔느부터 현대 공공건축까지 살펴보고 있다. 이 장에서 그는 나움 가보가 말한 ‘구성적 이미지’란 개념을 들어 개인적이고 제한된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이미지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개인의 주관성이 강조되는 추상표현주의와는 달리 객관적이고 구성적으로 보이는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공건축에서 보듯 우리 주변의 변화하는 새로운 세계에 맞추어 조직되고, 구성되며, 생명력을 소통시키는 새로운 이미지들의 등장을 언급함으로써 시각예술의 범위를 더한층 확장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의 의의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인류가 지나온 전 역사를 관통하는 허버트 리드의 거대한 구도는 비단 현대에 나타난 해석하기 어려운 이미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뿐 아니라, 그것이 등장하도록 한 미학과 미의식의 진화과정, 이미지와 의식 간의 긴장이 어떻게 예술적 창조로 이어지게 되는가 하는 과정에 대한 단서를 던져 준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인간의식을 문어에 비유한다. 그 문어는 촉수의 끝마다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는 미술가의 지각을 달고 있다고 한다. 이 문어는 끊임없이 촉수를 움직이며 사방으로 탐색하는데, 그것은 저자가 언제나 새로운 시각 이미지의 등장을 인간의식을 보다 확장시키는 것이라고 반겼던 것처럼 시각 이미지의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는 ‘허버트 리드가 문제를 제기한 1954년 이후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책이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우리 인식수준을 앞서가는 미래적 이미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지금, 그리고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인식적 지평이 열리고 있는 지금, 저자의 ‘문어’ 비유와 시각 이미지가 사상에 앞선다는 주장은 한 번쯤 떠올려 볼 만한 것이다.

허버트 리드 (저자)

1893년 영국 오크셔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에 블레이크와 브라우닝의 영향을 받아 시인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 출정했다가 귀국한 후,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하면서 스테인드글라스와 도자기를 취급했다. 이때 소장품 해설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1929년부터는 케임브리지대학, 에든버러대학, 리버풀대학, 하버드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후 시작(詩作)과 문예비평, 교육이나 정치에 대한 발언과 함께 미술사 연구와 비평에 주력하여,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 전위예술운동의 선구자로서 업적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벌거벗은 용사>(시집), <예술의 의미>, <아나키즘의 철학>, <이콘과 이데아>, <모순적인 경험>(자서전) 등이 있다.

김병익 (역자)

193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동아일보 문화부에서 기자 생활(1965~1975)을 했고, 1967년 《사상계》에 <문단의 세대연대론>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70년 계간 《문학과 지성》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75년 문학과지성사를 창사하여 대표로 재직했다. 2000년 퇴임한 후, 현재는 문학과지성사 상임고문으로 있다. 저서로는 《상황과 상상력》, 《전망을 위한 성찰》, 《기억의 타작》 등의 비평집과 《한국문단사》, 《페루에는 페루 사람들이 산다》 등의 산문집, 그리고 《현대 프랑스 지성사》, 《마르크시즘과 모더니즘》 등의 역서가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문화상, 팔봉비평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자/역자의 다른 책들

신판 서문
서문

1. 생명의 이미지
2. 아름다움의 발견
3. 미지의 것에 대한 상징
4. 이상으로서의 인간
5. 실재의 환상
6. 자아의 개척
7. 구성적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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