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찾아서

우주를 그리는 화가 오경환이 2002년에서 2006년 사이에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며 남긴 스케치와 단상들을 모은 책이다. "여행은 열병이다, 연애다, 못 견딘다"고 하는 그는, 별을 찾아 떠난 페루, 아르헨티나, 칠레에서 그곳의 광활한 하늘과 땅을 작은 화폭이지만 자유로운 필체로 담아 왔다. 여기에 화가 특유의 간결하고 재치있는 글이 함께 흐르며 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저자 서문
떠남의 찬가

유아 때의 여행 체험은 네다섯 살 때쯤이다. 나는 동네 아이들과 머나먼 길을 떠났다. 너른 들판 지나 큰 개울을 건너 하루 종일 걸었다. 야트막한 소나무 숲을 지나 맞부딪힌 거대한 부처. 하도 커서, 우리는 놀라움에 말을 잊었다. 그 돌부처는 관촉사灌燭寺 은진미륵恩津彌勒이었다. 해방 전 우리 식구들은 논산에 한동안 살았었다. 쉰 넘어 그 기억을 찾아 절 앞 작은 여인숙에서 숙박했다. 졸시 「관촉사에서」를 쓰게 된다. 평생 여행 떠나는 것과 부처님 좋아하는 것이 이렇게 어릴 때의 추억과 맞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 꼬마들은 밤늦게 동네에 돌아왔는데, 실종된 줄 알고 동네가 온통 난리가 나 우리 일행 셋은 각자의 집에 가서 야단을 크게 맞았다.
대학 일학년 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충북 보은의 외가를 방문했다. 고향 같은 아름다운 시골이다. 나는 옆동네 사는 초등학교 동창을 찾아 집을 나섰다. 그는 나보다 댓 살 위였고, 이미 결혼하여 아이도 둘이 있었다. 가는 길에 큰 소나무 숲을 지나며 옛 생각이 났다. 내 어릴 적 꿈은 동네를 감싸고 있는 금적산金積山의 정상을 오르는 것이었다. 그 산은 영화사 파라마운트의 로고처럼 늠름하고 위엄이 있으며 아름다웠다. 바로 산행을 시작했다. 충북 남부에서는 속리산俗離山 다음으로 큰 산이었다. 정상에 이르니 벌써 해가 서쪽으로 지며 금강錦江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고, 팔십여 리 밖 옥천 읍내까지 보였다. 하산하니 한밤중. 더듬더듬 내 동창 집 찾아 저녁 먹고 밤 늦게까지 술 마시며 놀다 외갓집으로 돌아왔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니 온통 횃불들을 들고 소동이 났다. 산으로 올라가는 나를 본 동네 어른의 걱정이 나의 실종으로 발전하여 오랜만에 온 동네에 큰 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자주 나타나는 들짐승이나 가파른 산길에서의 조난을 걱정한 동네 사람들 앞에 자정 넘어 나타난 나는 만취 상태였다. 동네 분들에게 심려 끼쳐드려 죄송하였으나, 나에 대한 사랑과 배려에 마음 한구석이 찡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강렬하여 주위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훌쩍 떠나는 버릇이 종종 나타난다. 나는 나의 실종과 부재를 즐기는 나쁜 습성이 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나의 존재를 확인한 특이한 기억이 있다. 두세 살 때쯤 어른들이 나의 팔다리를 잡고 몸에 쑥뜸을 떴다. 살 타는 냄새, 쑥 냄새, 연기.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소리치는 나의 울음은 처절한 절규였다. 나중에 이야기 들으니, 어릴 적 드러난 내 성격을 고치기 위해 이러한 체형體刑을 했다고 하나, 이것은 내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어린아이에게 가한 이 행위가 아무리 바람직하다 해도 너무 가혹했고, 그것이 어른들 생각대로 효과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나는 반항적이었다. 형제 중 가장 야단을 많이 맞았다. 집과 학교는 나를 옥죄는 속박처럼 느껴졌다. 빨리 어른이 되어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더했다. 예민한 사춘기에, 공부만 강조되는 소위 명문학교(서울중고등학교)는 감옥 같았다. ‘서대문 감옥’이라는 이 학교에서 황순원黃順元, 조병화趙炳華 같은 선생님과 나를 그림의 길로 들어서게 한 윤재우尹在玗 선생님을 만난 것은 큰 다행이었다. 내가 미술반에서 그림 그리고 신문반에서 만화를 그릴 수 있었던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억압적인 중고등학교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황석영黃晳暎의 성장기 소설을 읽으며 크게 감동한 것은 너무나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고교생활 말미는 진로 문제로 큰 위기를 맞는다. 미술대학 진학이 어머니와 담임선생의 철저한 봉쇄로 좌절된 것이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집을 떠났다. 그 떠남은 기쁨의 여행이 아니라 절망과 좌절의 여행이었다. 나는 처연한 마음으로, 방향도 시한도 없이 서울역을 떠났다.
나의 화가에의 소망은 일 년의 시간이 지나 이루어졌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사일구, 오일륙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교는 혼란스러웠고 계속되는 휴교 상태였다. 그때 나는 에이A 텐트 하나 가지고 도봉산道峰山, 북한산北漢山에 가서 며칠씩 있다 오곤 했다. 그때 찬연한 밤하늘의 별을 보았고, 그것들은 나중에 나의 그림에 나타난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이후 나는 온통 우주와 별에 몰입하게 된다. 우리 인간은 우주 속의 아름다운 작은 별 지구에 태어나 살다 사라지는 존재임을 알았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별을 가능한 한 더 보고 싶고 알고 싶은 열망을 제어할 수 없었다.
사십 이후 나는 국내 이곳저곳, 다른 나라 이곳저곳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바빠 서울 떠날 시간 없으면 시내버스, 전철 투어도 한다. 서울은 급격히 커져 한평생 산 나도 처음 보는 동네가 많다. 늙어 돈 안 내고 소요산逍遙山 단풍 구경, 강촌 폭포, 인천 월미도, 천안 아라리오 미술관, 눈 덮인 남한산성南漢山城도 갔다. 서울 가까운 제천, 치악산雉岳山, 양평, 문산은 출퇴근하듯 수시로 간다. 1980년초 프랑스에 있으며 유럽 미술관을 돌아다녔고, 1980년말 개인전으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동안 미국 서부를, 1990년초 뉴욕 교환교수로 있는 동안 미국 동부, 바하마, 멕시코 등지를 다녔다. 2002년 안식년 얻어 2003년까지 페루를 중심으로 남미를 다녔다. 2005년 퇴임 앞두고 따뜻한 남쪽나라에 살고 싶다는 김만철金萬鐵의 말대로 거제도에 집을 얻어 이 년간 살았다. 2009년 인천에 아름다운 창고 아틀리에art platform가 생겨 일 년 반 있었다.
여행은 나에게 화실이나 같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문화를 그리고, 자연을 접한다. 나는 길에서 생각을 주워 담았으며, 그 생각들은 길에서 완성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떠나면 왜 그리 행복한지, 겨드랑이에 날개가 서서히 자라 넓은 창공을 날아간다.
움직이는 차 속에 앉아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술 한 잔을 들고 있어 보라. 약간 졸린 듯한 기분의 상태는 나에게 천국 바로 자체이다.
죽기 전 더 많이 보리라는 나의 소망은 절절하다. 이제 우주 비행이 가능한 시대이다. 지금은 경비가 비싸지만 점점 싸질 것이다. 내 건강과 수명이 가능하면 집을 팔아서라도 지구를 잠시라도 떠나 볼까 한다. 그러나 그 전, 이 아름다운 별 지구를 돌아다니며 ‘모두 떠나라, 일상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으로부터’라고 외칠 것이다.

 

오경환 (저자)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국가고사로 서울중학교에 입학, 삼학년 때 미술선생 윤재우尹在玗의 권유로 미술반 활동을 했고, 서울고등학교 일학년 때 교지에 만화 「방울군」을 연재했다. 1959년 서울대 미술대 회화과에 입학했고, 대학 졸업 후 학사장교ROTC 1기 포병장교로 비무장지대 관측소DMZ OP에서 근무했다.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으로 충격을 받았으며, 첫 개인전을 신문회관 화랑에서 열면서 우주미술의 필연성을 발표했다. 1971년 양순혜와 결혼했다. 양순혜는 후일 건국대 일어과 교수가 되었다. 1971년 이후 상명대, 동국대 교수를 역임했다. 1965년 이후 「창작미술협회전」 「국전」에 수차례 발표했다. 파리, 로스앤젤레스, 리마, 서울 등지에서 열한 차례의 개인전을 가진바 있으며, 최근에는 2009년 우주미술의 선두주자로 대전에서 열린 국제우주대회ICA 특별 개인전을, 2005년 일민미술관 갤러리 175에서 회고전을, 2011년 OCI 미술관 초대전을 가졌다.

떠남의 찬가 – 오경환 5
A Summary 9

Works 작품 13

별을 찾아 떠난 여행 – 안규철 155
오경환의 남아메리카 여행 일지 158
작가 약력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