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박물관의 지하

미지의 박물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하세계로의 탐험을 통해 예술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한 감정사의 이야기다. ‘박물관’을 배경으로 하여, 지금껏 고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봐 왔던 ‘예술’ ‘예술가’ ‘예술작품’ 등을 소재로, 만화가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예술에 관한 여러 담론들을 신선하고 기지있게 그려냈다.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질 배경 설정과 듀오톤의 간결하면서 강렬한 그림으로 상상조차 못 했던, 루브르의 숨겨진 공간을 만난다.

루브르가 만화가의 창조력과 상상력에 던져 준 백지수표

“한 폭의 그림, 하나의 컬렉션, 혹은 박물관의 방 하나 또는 그 전체로부터, 이야기를 창조하는 작가와 예술작품 간에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그야말로 그들의 창조력과 상상력에 백지수표가 주어졌다.”
―앙리 로이레트(Henri Loyrette) 루브르 박물관 관장

루브르 박물관과 프랑스의 만화전문출판사 퓌튀로폴리스의 기획으로 열화당에서 선보이기 시작한 ‘루브르 만화 컬렉션’, 첫째 권 니콜라 드 크레시(Nicolas de Crécy)의 『빙하시대(Période glaciaire)』에 이어서 둘째 권 마르크-앙투안 마티외(Marc-Antoiane Mathieu)의 『어느 박물관의 지하(Les Sous-sols du Révolu)』를 내놓는다. 가장 고전적인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현대적인 예술매체인 만화와 손잡고 선보이기 시작한 이 시리즈는, ‘박물관’을 배경으로, 정형화되고 고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봐 왔던 ‘예술’ ‘예술가’ ‘예술작품’ 등의 소재를 만화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맡김으로써, 예술에 관한 여러 담론들을 신선하고 기지있게 그리고 대중적으로 공감해 보자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크레시의 『빙하시대』가 유쾌한 상상력으로 미래의 루브르를 보여주었다면, 마티외의 이 책 『어느 박물관의 지하』는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질 배경 설정, 깊은 사유와 성찰에 기반한 뛰어난 상상력,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에 걸맞은 듀오톤의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그림으로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상상조차 못 했던, 루브르의 숨겨진 공간을 만난다
과거인지 미래인지 현재인지, 시대적 배경이 설정되지 않은 어느 날, 주인공인 르 볼뤼뫼르와 그의 조수 레오나르에게 이름조차 규정되지 않은 한 거대한 박물관의 측량과 감정이 맡겨진다. ‘만기된 것의 박물관(Musée du Révolu)’ ‘과하게 요구된 것(Le voulu démesuré)’ ‘말 못 하게 된 자의 작품(L崍uvre du Muselé)’ ‘꿈만이 지닌 유연함(Le seul mou du rêve)’ 등으로 불리는 이 박물관의 이름들은 다름 아닌 ‘루브르 박물관(Le Musée du Louvre)’의 애너그램(anagram, 단어를 구성하는 철자의 순서를 바꾸고 재조합해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일종의 철자바꾸기 게임)이다.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그 잔재들로만 가득한 박물관 내부를 암시하는 이 어색한 이름들처럼, 주인공들에게 맡겨진 박물관의 측량과 감정 또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 누구도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한 실체에 관한 작업이다. 작가는 이러한 설정 속에서 전시실에 걸린 예술작품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숨겨진 거대한 공간에 시선을 준다. 오래된 갤러리, 주형과 파편의 보관소, 복원실, 복제실, 액자 창고 등등, 박물관의 드넓은 지하층을 조사하면서 드러나는 예술의 기원과 모사・복원의 문제, 걸작을 둘러싼 비밀에 관한 만화가 마티외의 사유들은 예술에 관한 상식과 통념을 뒤집는 시적 상상과 철학을 전개하며, 지금껏 생각해 보지 못한 ‘예술의 본질’에 관한 문제들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예컨대 복원실을 방문한 주인공들이 듣게 되는, 작품을 완전하게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의해 훼손된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아이러니컬한 복원의 역사, 원본을 능가하는 모사품의 진실성, 특히 박물관에서 가장 사랑받는 그림 〈모나리자〉가 애초에 몇몇 다른 버전들로 제작되었으며, 사실은 각기 다른 버전들을 번갈아 전시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기막힌 비밀 등 작가가 발휘하는 상상력은 현실을 전제한 비현실이기에 더욱 특별해 보인다.
주인공 르 볼뤼뫼르는 생을 마감하기까지 이곳에서 49년 49일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때에서야 자신의 이름인 외드 르 볼뤼뫼르(Eudes le Volumeur) 역시 ‘루브르 박물관(Le Musée du Louvre)’의 애너그램이었음을 알게 된다. ‘기록하는 자’라는 뜻의 그 이름은, 그가 축적된 고대 문명을 토대로 형성된 인간이며, 루브르와의 만남이 필연적이었음을 암시한다. 주인공이 해 온 측량과 감정은 예부터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어 왔고, 옛 기록을 넘겨주고 떠난 이전의 감정가처럼 그 역시 또 다른 신참 감정가에게 자신의 기록을 넘겨준다. 이러한 지식과 역사의 부단한 전달 과정, 그 보이지 않는 손길에 대한 깊은 관심은 고전을 향한 경외의 한 표현이다. 결국 볼뤼뫼르가 감정한 것은, 예술을 둘러싼 오랜 역사와 사고가 집약된 거대한 박물관, 즉 예술작품으로서의 박물관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끝내 감정하지 못한 채, 다만 예술의 본질은 알 수 없으나 그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깨닫고 생을 마감한다.

언론매체 기사
한겨레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저자)

만화가. 1959년 앙제에서 태어났다. 1987년 <파리­마콩(Paris-Macon)>을 출간했고, 1990년 <기원(L origine)>을 통해 여러 전시회와 언론의 인정을 받으며 재능있는 이야기꾼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전시기획 무대설치를 전문으로 하는 그래픽 사무실에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줄리우스 코랑탱 아크파크, 꿈의 포로(Julius Corentin Acquefacques, prisonnier des r?ves)’ 시리즈(1990-2004, 전5권), <그림자들의 마음(Le Coeur des ombres)>(1998) 등이 있다.

김세리 (역자)

1972년에 태어났다. 홍익대 미학과에서 「카뮈의 미학 사상 연구」(2003)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 파리1대학 조형예술 예술학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시각 이미지의 기호학적 분석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다. 2007년 현재 홍익대, 한국외국어대, 인하대에서 미술 및 만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저자/역자의 다른 책들

만화, 예술의 애너그램 – 역자 해설
역주(譯註)

어느 박물관의 지하

첫번째 날: 보존실
세번째 날: 정상을 향한 기초공사
서른세번째 날: 기계 회랑
마흔여섯번째 날: 물에 잠긴 갤러리
이백열두번째 날: 주형 보관소
육백쉰한번째 날: 파편들의 방
구백열여섯번째 날: 복원실
천사백열세번째 날: 복제실
삼천팔백쉰번째 날: 그림 보관소
오천팔백아홉번째 날: 기록 보관소
구천칠백스물일곱번째 날: 늙은 감정가
만번째 날: 액자 창고
만천팔백아흔네번째 날: 골동품학
만사천오백일곱번째 날: 도상
만육천육백열번째 날: 아주 거대한 계획
만팔천백서른네번째 날: 마지막 장

인용된 작품 목록
루브르, 성(城)에서 박물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