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시간 속으로

루브르 박물관과 프랑스 만화전문출판사 퓌튀로폴리스의 기획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루브르 만화 컬렉션'. 세번째 권. 매일 밤 미지의 시간에는 소외되고 묶여 있던 작품들이 해방된다. 측정될 수 있는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을 부정하는 미지의 시간은, 관람자와 예술작품이 영혼으로 교감하며 진정으로 소통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이 작품에선‘예술’과 ‘예술가’ ‘예술작품’의 존재 외에 ‘관람객’의 시선이 더해진다.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듯 보이는 소외된 존재인 박물관 경비원(청각장애인)과 예술작품을 교묘히 겹쳐 놓고, 그들 모두가 존재감을 회복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신비롭게 그리고 있다.

“박물관의 세계를 만화의 세계에 연결시키는 것은 언뜻 봐서는 엉뚱해 보이는 시도다. …우리 기획의 야심은 이 두 세계 사이에 견고한 가교를 만들어, 만화 독자들에게는 루브르의 전시 작품에 관심을 갖게 하고 루브르를 자주 찾는 관람객들에게는 우리 시대의 생동하는 창작에서 비롯된 새로운 표현의 예술작품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앙리 로이레트(Henri Loyrette) 루브르 박물관 관장

루브르 박물관과 만화의 유쾌한 만남
루브르 박물관과 프랑스 만화전문출판사 퓌튀로폴리스의 기획으로 열화당에서 선보이기 시작한 “루브르 만화 컬렉션”. 『빙하시대(Preiode glaciaire)』와 『어느 박물관의 지하(Les sous-sols du Revolu)』에 이어, 세번째 권 『미지의 시간 속으로(Aux heures impaires)』를 선보인다. 가장 고전적인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현대적인 예술매체인 만화와 손잡고 선보이기 시작한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정형화되고 고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봐 왔던 “박물관”을 배경으로 “예술” “예술가” “예술작품” 등의 소재를 만화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맡김으로써, 예술에 관한 여러 담론들을 신선한 이야기로 대중과 함께 공감해 보자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첫번째 권 『빙하시대』가 유쾌한 상상력으로 미래의 루브르를 그리고, 두번째 권 『어느 박물관의 지하』가 예술의 본질에 관한 깊은 사유를 보여주었다면, 세번째 권 『미지의 시간 속으로』는 관람객과 예술작품의 영혼의 대화를 권유하면서 그 소통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품을 아이들에 비유하면 그들은 모두 자신을 창조한 사람을 잃은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지. 그들은 고아야, 그러나 살아 있어! 그들은 보살핌을 받아. 여기저기 복원작업을 거치면서 말이야. 근데 아무도 그들의 영혼에 신경 쓰진 않아.” ―본문 중에서

예술작품의 영혼을 보살피는 청각장애인의 이야기
『미지의 시간 속으로』에는 “예술”과 “예술가” “예술작품”의 존재 외에 “관람객”의 시선이 더해진다.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품이 건네는 영혼의 소리를 듣도록 하기 위해 리베르주는 주인공을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하고 있다. 졸업을 앞두고 견습차 루브르에 온 청각장애인 바스티앵은 면접 약속시간을 기다리던 중, 루브르의 야간경비원이자 마찬가지로 청각장애인인 신비로운 인물 퓌지아를 만나 미지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누가 예술작품의 영혼을 보살필 것인가. 예술작품과 소통할 시간이 없이 단지 그것을 소비하기만을 바라는 관람객들이나, 예술작품의 “육체”만을 복원할 줄 아는 관리자들은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미지의 시간 속에서만 임무를 수행하는 야간경비원이 있다. 매일 밤 미지의 시간에는 세세하게 규정된 순서에 따라 작품들이 해방된다. 소외되고 묶여 있던 작품들이 스스로를 발산하고 원천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시간 속에선 바스티앵과 예술작품만 존재할 뿐 박물관에서 야간경비를 서는 다른 경비원들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측정될 수 있는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을 부정하는 미지의 시간은, 관람자와 예술작품이 영혼으로 교감하며 진정으로 소통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관람객들이 서둘러 지나치면서 제대로 눈길을 주지 않는 예술작품은 정상인의 세계에서 늘 소외되고 상처입는 바스티앵과 닮은 존재이다. 미지의 시간 속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들을,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이나, 박물관에 전시된 예술작품과는 그다지 상관 없어 보이는 야간경비원으로 설정한 것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데 특별한 자격이나 지위 따윈 필요 없음을 뜻한다. 박물관에서 직접 관객을 안내하고 예술작품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임무는 박물관 경비원들이 맡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감은 박물관 전체에서 미미하기 짝이 없는데, 이는 청각장애인인 바스티앵이 정상인의 사회로부터, 예술작품이 관객으로부터 당하는 홀대와 유사하다. 작품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듯이 보이지만 소외된 세 존재인 박물관 경비원과 청각장애인, 예술작품을 교묘히 겹쳐 놓고 그들 모두가 존재감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신비롭게 보여준다. 매일 밤 미지의 시간에 작품들을 깨우는 것은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라 믿음의 소리인 것이다. 작품을 해방시키는 도구가 청각장애인들이 유일하게 연주할 수 있는 타악기라는 설정 또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교감이라는 작가의 생각을 잘 전달해 준다.
루브르 만화 컬렉션 두번째 권인 『어느 박물관의 지하』에서 주인공 볼뤼뫼르가 전임자들에게서 자신의 임무를 물려받듯, 이 책 『미지의 시간 속으로』의 바스티앵도 퓌지아에게서 매일 밤 작품들을 해방하는 임무를 물려받는다.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자신의 중요한 임무를 물려주는 이러한 스토리는, 예술에 관한 끊이지 않는 탐구, 예술작품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에릭 리베르주 (저자)

1965년에 태어난 만화작가로 주로 만화동호인 잡지를 통해 활동했으며, 판타지 애호가들에게 인기있는 작가다. 주요작품으로 『마지막 마르뒤(Le dernier Marduk)』(2000), 『성난 천둥(Tonnerre rampant)』(2002), 『금속(M?tal)』(2003), 『마르디-그라 데상드르 씨(Monsieur Mardi-Gras Descendres』(컬러판, 2004) 등이 있다. 죽음과 연금술, 비교적(秘敎的)인 분위기를 긴 텍스트와 잘 조화시키는, 판타지 애호가들에게 중요한 작가이기도 하다.

정연복 (역자)

긴이 정연복(鄭然福)은 1963년생으로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서 「몰리에르의 발레-희극 연구」(1998)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덕여대 강의전임교수를 역임하고 프랑스 파리로 가서 루브르학교 1기 과정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서울대학교, 아주대학교, 중앙대학교에서 프랑스 예술과 문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등을 강의했고, 현재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며 번역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역서로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1992), 장 보드리야르의 『섹스의 황도』(1993), 에릭 리베르주의 『미지의 시간 속으로』(2009), 베르나르 이슬레르와 장-클로드 카리에르의 『루브르의 하늘』(2010), 크리스티앙 뒤리외의 『매혹의 박물관』(2012)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