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문화와 사상10

책머리에 – 21세기 사회과학의 새로운 유교 인식

유교(儒敎)는 일반적인 사회관습이나 세속적인 예의범절과 같은 도덕규범 내지는 그 원리로서의 윤리로 규정되는 단순한 상식적 규범의 신념체계가 아니다. 몇 마디 몇 구절로 개괄할 수 없는 매우 깊고 넓은 포괄적 개념이다. 상식적인 윤리도덕규범인가 하고 들여다보면 가치의 원천과 그 지향을 일관되게 제시하고 있는 윤리학이다. 윤리학인가 하고 들여다보면 정치학이다. 정치학인가 하면 경제학이요, 경제학인가 하면 경영학이다. 경영학인가 하면 심리학이요, 심리학인가 하면 예술학(미학)이다. 예술학인가 하면 종교학이요, 종교학인가 하면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일관하고 우주와 인간을 아우르며 통합하는 거대한 생명철학이다.

사회과학은 사전적인 의미에서 풀이하면, 인간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과학적·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경험과학을 총칭하는 말이다. 윤리학, 사회학, 정치학, 법학, 심리학, 예술학, 종교학 등이 여기 포함될 수 있으며, 이들 여러 분과학문은 일정한 인위적·창조적 요소가 전제돼 있다는 점에서 문화과학이라 불러야 합당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유교는 사회과학을 두루 포함하면서도, 그것들을 뛰어넘어 형이상학적 절대·보편 존재의 세계로까지 초월해 가고, 아울러 그 형이상학적 절대·보편 존재의 세계가 다시 각개 개별의 세계로 내재화하여 자주적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종교나 종교학으로부터 분리·독립된다. 유교가 인간사회 속에서 종교적 역할을 분담하고 종교적 욕구를 해소시켜 주면서도 종교, 종교학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유교가 본래부터 갖고 있는 포괄적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유교의 포괄적 개념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 어떤 식견(識見)으로도 유교를 바르게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널리 알려진 막스 베버(Max Weber)가 중국에는 생활을 관리하는 계층의 내적 태도에 합리적인 과학도 없고, 합리적인 예술도, 신학도, 법률학도, 의학도, 자연과학도, 기술도 없고, 그리고 그 어떤 식의 권위도, 같은 신분 내의 인간적인 권위도 없으며, 그 어느 것 하나 경쟁자로서 나타나거나 등장하지 않고 있다고 일갈(一喝)한 데 대해, 유교를 비롯한 동양사상에 거의 무지했던 베버였음을 인정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유교에서 최고 성자(聖者)로 추앙받는 공자(孔子)는, 인간만이 진리를 인식하고 주관하고 실천하여 더 높은 차원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발전시킬 뿐이니, 진리 그 스스로는 인간을 떠나 그 어떤 발휘도 할 수 없다고 말하여 인간의 위대성을 선언하고 있다. 증자(曾子)는 생명의 총화체인 우주의 본래 속성이 개개 인간에게 생래적(生來的)으로 내재화한 것을 본성이라고 말하여 우주생명의 본질속성과 인간생명의 본질속성이 상통·합일될 수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맹자(孟子)는 인간의 본성이 생래적으로 선할 뿐만 아니라, 모든 윤리적 가치가 본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서구문화 전통의 가장 큰 흐름의 맥을 형성하고 있는 기독교의 하나님에 의한 천지창조론의 입장에서 이같은 인간중심주의적 유교를 바라보거나, 기독교정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견으로 유교를 바라보면 유교적 합리주의 또는 유교적 진리가 정상적인 것으로 보일 리가 없다.

1997년말에 우리나라의 경제활동이 IMF의 관리하에 들어갔을 때, 『뉴욕 타임스』는 ‘아시아의 항복’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아시아는 드디어 항복했음을 외치고, 지난 이삼십 년간 지탱해 온 국가경제의 ‘일본 모델’이 아시아 지역에서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비판과 함께 자신들이 승리했음을 기뻐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아시아통으로 알려진 리처드 훌브룩(Richard Hullbrook)은 ‘아시아는 없다’ ‘그 유명한 아시아적 가치는 다시 발붙이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면서 그 본심을 활짝 들어낸 바 있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적 문화의 기준으로 아시아의 붕괴를 진단한 것이며, 미국인적 마음의 상태로 아시아의 패배를 기도한 것이다.

저들이 말하는 아시아적 가치란 대부분 유교적 가치를 말한다. 『뉴욕 타임스』와 훌브룩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본의는 적어도 이삼십 년 동안 미국이 동아시아 경제발전의 페러다임으로 간주해 온 ‘유교적 자본주의’를 절대적 관계 내지는 극복의 대상으로 보아 왔다는 데 그 충격적 핵심이 놓여 있다. 저들의 본의는 그 유명한 미국 하버드 대학 석좌교수 새뮤얼 헌팅턴(H. P. Huntington)의 ‘문화충돌론’과도 맥을 같이한다. 헌팅턴의 논조는 종국적으로는 서구문명과 아시아의 중화·이슬람의 연합문명 간의 대립으로 귀결되고 있다. 문명충돌론에 제시된 헌팅턴의 동서양 문명충돌론은 냉전의 종언이라는 새로운 상황변화에 적응하면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정치학적으로, 즉 과거의 냉전을 문화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는 의문을 지우기 어렵다. 헌팅턴의 주장은 매우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언어 구사를 통해 중화문명과 이슬람 문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절대적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새롭게 부상하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서구문명의 정치·경제·군사적 틀이 결속강화를 부추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문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자신의 서구적 정체성을 재인식하고, 또한 서구문명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비서구문명의 도전에 강력히 대응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우리는 헌팅턴의 이런 주의주장을 통해 그가 얼마나 서구중심적 사고에 젖어 있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가늠해낼 수 있으며, 비서구문명의 부활에 얼마나 불안해 하고 있는가를 읽어낼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지난 20세기 백여 년에 걸쳐 유교가 서구인과 서구문명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인과 동아시아 문명 스스로에 의해 얼마나 핍박받아 왔고, 소외되어 왔는가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화의 세기로 지칭되는 21세기에 진입해서는 유교에 대한 새롭고 온당한 이해가 시도돼야 한다. 지금은 이미 상당 정도 그 시도가 진행되고, 그 관심도가 높아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사회학을 비롯한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전반 분야에서 과거에 비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피부로 감지할 수 있다.

필자가 자주 언급하고, 한국의 사회과학계에 나타나고 있는 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시도는 서구문명에 대한 도전이 아니다. 서구의 문화적 헤게모니,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치적·경제적·군사적 헤게모니에 억눌렸던 동아시아 문화의 위상을 회복하고 우리의 잃어버린 정체성과 문화전통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새롭게 개발하자는 호소의 일단일 뿐이다. 다시 강조하여 말하면, 한국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에서 채용하고 있는 정치, 경제 등 제반 문화구조가 자본주의적 산업·정보화이든, 자본주의적 경제·민주화이든, 자본주의적 문화·세계화이든, 그 뿌리는 유교를 비롯한 우리들의 고유문화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아시아의 근대화가 ‘아시아의 서구화’에 치우쳤다면, 이제부터는 ‘서구의 아시아화’ ‘자본주의의 아시아화’ ‘민주주의의 아시아화’로 그 방향이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을 거둘 때 비로소 헌팅턴이 말하는 문명의 충돌이 슬기롭게 극복되고, 보다 승화된 문명의 화합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갓 진입한 21세기가 동서양의 문화 화해를 통해 모든 생명이 존대받는 시대로 전개되기를 희망해 본다. 

단기 4336년 6월
동아시아문화포럼 회장
편집인 겸 주간 송하경

 책 머리에 21세기 사회과학의 새로운 유교 인식 / 송하경

특집 한국 사회과학계의 유교 인식
논문 1 한국 사회학계의 유교 인식 유형과 그 문제점 / 최영진·소현성
논문 2 실패한 전략 담론―유교민주주의론 / 이상호
논문 3 유학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의 성찰과 전망 / 유권종
논문 4 한국 페미니즘 학계의 유교 인식 / 안외순
종합토론 

제11호 특집 예고

문제와 시각 세계화와 중국문화의 재창조 / 조광웬
제10호 발간기념 특별좌담 동아시아 담론의 오늘과 내일 

고전의 세계
『주역』 땅, 여성과 신화 / 최영진
『논어』 색을 밝히듯 현인을 탐하라 / 안재순
『노자』 티끌(芒芥) 하나도 앎의 세계에서는 무량세계다 / 송항룡 

서평 1 깨달음으로의 초대 / 정재걸
서평 2 중국사상의 통시적(通時的) 정리와 형이상학적 이해의 기초 / 서준원
서평 3 유교, 아시아 부흥의 원천 / 임태홍 

동아시아 문화연구의 현장 21세기 아시아의 모습 / 임태홍

동양예술산책
디지털 시대와 ‘복귀어박(復歸於樸)’의 예술창조 / 박명원 
동양철학용어사전 義 / 강필선 

필자 약력
社告
동아시아 문화와 사상 제1-9호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