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내장

『다른 방식으로 보기』 『본다는 것의 의미』 등 저작을 통해, 보는 행위와 인식에 관한 빼어난 통찰을 보여 온 작가 존 버거. 그의 신작 『백내장』은, 시각적인 것에 관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예언자인 존 버거가 백내장 수술이라는 작은 기적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전하는 기록과 명상으로, 터키 출신의 예술가 셀축 데미렐의 삽화들이 이 기록과 명상에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시각의 문이 깨끗해지면, 모든 사물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영원한 모습을 인간에게 드러낼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우리 시대의 진보적인 지성, 현존하는 영국 출신 작가 중 가장 깊고 넓은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가장 광범한 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작가, 여든을 넘긴 나이인 지금도 농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는 작가, 그리고 미술평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다양한 영역에서 글쓰기를 하고 있는 존 버거(John Berger, 1926- )의 신작 『백내장(Cataract)』이 출간되었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1972), 『본다는 것의 의미(About Looking)』(1980), 『랑데부(Keeping a Rendezvous)』(1991) 등을 통해 시각에 관한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 주었던 존 버거가 이번에는 시적 메타포가 충만한 작품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백내장 제거 수술 이후의 몇몇 단상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예언자인 존 버거가 백내장 수술이라는 작은 기적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전하는 기록과 명상으로, 터키 출신의 예술가 셀축 데미렐(Selçuk Demirel, 1954- )의 삽화들이 이 기록과 명상에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한편 『아픔의 기록』을 옮겨 선보인 바 있는 문학평론가 장경렬의 번역은 원문 한 글자 한 글자까지 섬세하게 재현해낸다.

“백내장을 뜻하는 ‘캐터랙(cataract)’은 그리스어 ‘카타락테스(kataraktes)’에서 나온 말로, 폭포를 뜻하기도 하고 내리닫이 창살이 드리워진 문을 뜻하기도 한다. 위에서 아래로 드리워진 차단막 같은 것, 그것이 백내장이다.” ―본문 6쪽

“폭포(waterfall)는 폭포이며 폭포일 뿐이다. 통상적으로 그것의 겉모습과 내면, 외양과 의미는 따로 떨어져 있지만, 폭포를 바라보면서 물음을 품는 사람에 의해 융합되어 서로 일치를 이룬다.” ―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눈에 드리워진 창살 같은 폭포는 시야를 가리며 그를 둘러싼 세계와 사물 사이를 침범한다.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1984)에서 조우했던 폭포(waterfall)는 그저 ‘폭포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폭포를 바라보며 끈질기게 의문을 품었던 그는 감춰진 이면을 발견하고는 ‘불투명한 장막’을 안경처럼 쓴 채 바라본 눈앞의 대상이 ‘또렷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대상 자체가 변화한 건 아니다. ‘낡은 것은 낡은 것대로 새 것은 새 것대로’ 대상은 본연의 자세를 충실히 이행한다. 바뀐 건 ‘사물에 비치는 빛과 사물이 반사하는 빛’뿐이다.

“생명을 창조하고 그 생명을 가시화(可視化)하는 빛. 아마도 이 자리에서 우리는 빛의 형이상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빛의 속도로 여행한다는 것은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무엇을 비추든 빛은 만물을 시원(始原)의 광채에 휩싸이게 하고 또 순수한 것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본문 12쪽

빛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사라져 가는 것을 비추는 온정’(허연 「사선의 빛」)처럼 따스하게 다가올 때도 있지만,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김수영 「사랑」) 하는 것처럼 불안하게 연인의 얼굴을 비추거나, ‘썩고 농한 것들만 찾아’(이성복 「빛에게 1」)내 악취를 풍기는 실체와 대면하게도 한다. 존 버거는 이러한 빛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기를 보면,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 맨 먼저 생겨난 것은 빛이었다. 빛이 생기자 자연스럽게 낮과 밤으로 나누어졌고, 이 둘이 한 번씩 지나가자 하루라는 시간이 시작된다. 존 버거는 ‘시원(始原)의 광채’, 즉 태초에 생겨난 근원으로서의 빛을 말하고 있다. 이 빛에 따라 사물은 다채롭게 변용되는 것이다.

“…한두 시간 후부터 수술받은 눈이 아프기 시작했고 통증이 하루 정도 계속되었다. 약한 진통제를 복용하자 통증은 상당히 견딜 만해졌다. 이 작은 통증을 뚫고 지나가는 길은 새로운 시각의 세계를 향한 나의 여정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각을 얻는 문턱에 이르는 순간 나는 고통에서 벗어났다.” ―본문 54쪽

백내장 제거 수술을 받은 후, 눈앞에 깊숙이 드리워졌던 막은 사라졌다.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맨눈으로 보기까지, 갇혀 지낸 시간만큼의 고통이 뒤따르는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고통을 딛고 올라선 자리에는 ‘새로운 시각의 세계’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 순간 우리가 만난 세상은 한 겹의 위장도 없이 살아 퍼덕이는 생명력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일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시각은 흐릿하게 멀어져 가는 풍경을 낚아채 우리 앞에 바로 세웠고, 눈감는 법이 아닌 제대로 기억하는 법을 일깨워 주었다.

“우리는 하나의 사라짐을 마주한다. 사라지는 것, 보이지 않게 되는 것, 그런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을 부인하게 하는 것, 우리 존재를 무시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을 이겨내기 위한 하나의 투쟁이 뒤이어 일어난다. 따라서 시각은 비가시적인 것 역시 실재한다는 믿음을 갖게 하고, 한번 본 것들이 공간이라는 복병에 의해 부재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영구히 맞서 보전하고 조합하고 정리하는, 내면적 눈을 기를 것을 촉구한다.” ―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하늘 어느 한 방향으로 번지는 잿빛의 정확한 강도, 손에 힘을 뺐을 때 손 마디마디에 주름이 잡히는 모습, 집에서 저 먼 곳으로 보이는 푸른 언덕의 굴곡, 이 모든 섬세한 시각의 영상들이 잃어버린 의미를 되찾게 되었다.” ―본문 60쪽

존 버거 (저자)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는 런던 출생으로,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처음 미술평론으로 시작해 점차 관심과 활동 영역을 넓혀 예술과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깊고 명쾌한 관점을 제시해 왔다.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농촌 마을로 옮겨 가 살면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해 왔다. 저서로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예술과 혁명』 『다른 방식으로 보기』 『본다는 것의 의미』 『말하기의 다른 방법』 『센스 오브 사이트』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모든것을 소중히하라』 『백내장』 『벤투의 스케치북』 『아내의 빈 방』(공저) 등이 있고, 소설로 『우리 시대의 화가』 『그들의 노동에 함께 하였느니라』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G』 『A가 X에게』 『킹』 등이 있다.

셀축 데미렐 (그림)

셀축 데미렐(Selçuk Demirel)은 1954년 터키 아르트빈 출생의 삽화가이다. 1978년 파리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그곳에 살고 있다. 『르 몽드』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더 워싱턴 포스트』 『더 뉴욕 타임스』 등의 일간지와 잡지에 삽화를 발표했고, 삽화집 및 저서가 유럽 및 미국의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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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렬 (역자)

장경렬(張敬烈)은 인천 출생으로,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미국 오스틴 소재 텍사스 대학교 영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평집으로 『미로에서 길 찾기』(1997), 『신비의 거울을 찾아서』(2004),『응시와 성찰』(2007), 문학연구서로 『코울리지』(2006), 『매혹과 저항』(2007), 번역서로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잠든 모습을 보며』(2000), 『야자열매술꾼』(2002), 『먹고, 쏘고, 튄다』(2005), 『셰익스피어』(2005), 『아픔의 기록』(2008),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2010), 『노인과 바다』(20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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