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의 유령

모든 창조 과정은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술가는 기억과 감수성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렇다면 역사를 탐구하거나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즉 예술가 자신의 기억 그리고 사회와 자연의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도대체 어떻게 인류와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기억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예술가의 작품 속에 항상 양각되어 있다. 그러나 거의 지각될 수 없을 때조차도 이 기억은 언제나 예술의 소재로 쓰인다.”
—엔키 빌랄(Enki Bilal), 2000년의 한 인터뷰에서.

유럽 만화계의 마르케스, 엔키 빌랄

자신을 ‘이야기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엔키 빌랄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참혹한 현실, 낭만적인 문학에서 묵시록적인 미래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다뤄 왔다. 그는 만화뿐만 아니라 영화 세트 디자인, 포스터 제작, 의상 디자인, 영화 연출 등 장르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다. ‘루브르 만화 컬렉션’의 여덟번째 이야기 『루브르의 유령(Les fantômes du Louvre)』(2012)에서 빌랄은 자신의 만화를 영화로 연출했던 경험을 살려, 루브르라는 공간이 담고 있는 무궁무진한 영화적 상상력을 깨운다. 루브르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무수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모두 현대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그 시대만의 독특한 삶의 흔적을 담고 있다. 그는 역사적 사실 속에 상상의 인물과 사건을 교묘하게 끼워 넣음으로써 우리를 환상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환상이지만 굉장히 정교하게 구축된 세계는 실재 세계 못지않은 현실성을 띤다. 그는 “역사와 상상력 사이에 하나의 관계를 형성하려고 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árquez)가 떠오른다. 마르케스가 남미의 신화나 구전되는 이야기들에 부패와 억압, 장기 집권으로 고통받는 조국 콜롬비아에 대한 비판의식을 중첩시킴으로써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듯이, 빌랄은 루브르의 예술작품에 깃든 유령들을 통해 그들이 살다 간 세계의 끔찍함, 비참함, 예술이 탄생되는 순간의 고통, 예술가의 고뇌 등을 탁월하게 보여 준다.
빌랄은 『루브르의 유령』을 그리기 위해 먼저 루브르에 소장된 작품이나 루브르 박물관을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사진 찍기 시작했다. 이렇게 찍은 사백여 장의 사진 중에서 스물두 장을 골라 캔버스에 인화한 다음, 사진에서 떠오르는 영감을 바탕으로 사진 위에 아크릴이나 파스텔로 유령을 하나씩 그렸다. 그는 이전부터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아주 열정을 보여 왔다. 그래서인지 현대의 가장 뛰어난 사실주의 만화가로도 손꼽히는 엔키 빌랄은 타고난 색채감으로 자신만의 유령을 생생하게 재현해낸다. 강렬하고 남성적인 질감과 힘이 실린 선과 색채는 따로따로 존재하는 루브르 소장품과 자신이 만들어낸 유령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또 다른 작품을 탄생시켰다.

“루브르에 가면 마치 유령을 호흡하는 것 같다. 회랑의 모든 구석마다, 작품의 부분 부분들에서, 눈길이 닿는 모든 것, 모든 곳에서, 마루에서, 벽의 주름진 곳에서, 천장에 들러붙어 있는 공기에서…. 박물관을 방문하는 시간 동안 폐에 들어찬 조각들은, 문 밖을 나서면 리볼리가(街) 혹은 센 강 부두 쪽으로 다시 뱉어질 것이다. 뱉어낸 조각들은 그들 시대에 단단히 연결된 부동의 증거로서, 운명이 원하는 대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엔키 빌랄

역사와 상상이 뒤섞인 스물두 개의 단편소설

빌랄은 각 예술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적 지리적 배경 위에 자신이 떠올린 이야기를 덧댄다. (이 책에 등장하는 지명, 인명, 전투 등은 대부분 실제 사실에 부합한다.) 렘브란트(Rembrandt)의 (1655)를 보자마자 푸주한을 생각해내고, 칼장수의 아들과 렘브란트의 만남을 떠올린다. 〈함무라비 법전비〉(기원전 1792-1750)를 보고는 노예 출신의 여성을 상상한다. 이 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노예에 관한 당시의 엄격한 법문을 자기 손으로 직접 새겼고, 자신의 신분이 밝혀지면서 남편에게도 쫓겨나 결국에는 지진으로 비참하게 죽어 간다. 때로 유령들은 화가의 모델이기도 하고 작품을 제작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발견 당시부터 머리가 없었던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기원전 190년경)에서는 급하게 말을 타고 가다 날카로운 줄에 머리가 잘려 죽어 가는 조각가를 창조해낸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탄생한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고 비의적(秘儀的)으로 만들어 주는 데에는 그의 독특한 문체도 한몫한다.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이 짧은 호흡으로 이어지는 문장은 우리가 흔히 보아 온 일반적인 문법을 뛰어넘고 있어, 문학에서의 온갖 분류화를 반대하며 명확한 경계를 믿지 않는 그의 생각을 짐작케 한다. 문장에 숨겨 놓은 듯한, 일견 말장난 같은 어휘들은 암시적이고 비약적이어서 때로는 뜻 자체가 모호하기까지 하다. ‘여드름투성이(boutonneux)’라는 어휘를 통해 청소년기의 미숙함과 16세기 후반의 종교전쟁을 둘러싸고 인간이 보여 준 미숙함과 어리석음을 연결해서 생각하도록 이끌거나, 우울과 연결된 멜랑콜리아(Melencolia)의 운명을 섬세하게 드러내기 위해 ‘안개(brume)’와 ‘축축한(humid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안개로 축축한(brumide)’이라는 단어까지 만들어낸다. 강박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어휘에 대한 집착은 ‘진위를 알기 어려운 진짜 같은 허구’에 대한 독자의 믿음을 유도하는 동시에, 유령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어둡고 차가운 분위기가 지배적인 이야기 곳곳에는 비극적인 순간에도 유머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러한 유머는 긴박한 상황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주면서, 다소 비논리적인 상황도 가볍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엔키 빌랄의 만화작품 중 국내에는 ‘니코폴 삼부작’과, ‘야수 사부작’의 첫 권 『야수의 잠』이 번역 출판된 바 있는데, 그의 미학적 서사적 세계는 ‘야수 사부작(La tétralogie du Monstre, 1998-2007)’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1993년 옛 유고슬라비아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세 인물이 2026년 테러와 독단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겪는 절망과 고통을 난폭하고 어두운 이미지로 그린 이 사부작은, 내전과 붕괴에 대한 기억을 통해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비춰 주는 묵시록적인 작품이다. 실제로 첫번째 권인 『야수의 잠(Le sommeil du monstre)』(1998)에는 원리주의적인 종교단체가 뉴욕의 고층빌딩을 파괴하는 설정이 있어,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난 뒤 논란이 되기도 했다. 『루브르의 유령』은 작가가 즐겨 다루는 미래가 아닌 과거로 돌아가지만, 루브르 소장품에 깃든 유령들을 깨우면서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폭력과 억압, 편견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는 그의 전작들과 맥을 같이한다.

언론매체 기사
한국일보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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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키 빌랄 (저자)

엔키 빌랄(Enki Bilal)은 1951년 옛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나 1960년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다. 1971년 필로트 출판사가 주관하는 만화경연대회에서 상을 받고 일 년 뒤 첫 작품 『저주받은 잔(Bol maudit)』을 출판했다. 첫 대표작인 ‘니코폴 삼부작(La trilogie Nikopol, 1980-1992)’은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예지 『리르(Lire)』가 1992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 외에 ‘야수 사부작(La tétralogie du Monstre, 1998-2007)’과 ‘분노의 발작 삼부작(La trilogie du Coup de sang, 2009-2014)’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사진이나 유리 공예 등의 분야에서도 활약하고 있으며 〈벙커 궁전 호텔(Bunker Palace Hotel)〉(1989), 〈티코 문(Tykho Moon)〉(1996), 〈니코폴(Nikopol)〉(2004) 등의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전시로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루브르의 유령(Les Fantômes du Louvre)』에 등장한 만화 컷으로 이루어진 전시회(2012-2013)와 파리 국립기술공예박물관에서 열린 「기계인간동물(Mécanhumanimal)」(2013-2014)이 있다.

정연복 (역자)

긴이 정연복(鄭然福)은 1963년생으로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서 「몰리에르의 발레-희극 연구」(1998)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덕여대 강의전임교수를 역임하고 프랑스 파리로 가서 루브르학교 1기 과정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서울대학교, 아주대학교, 중앙대학교에서 프랑스 예술과 문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등을 강의했고, 현재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며 번역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역서로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1992), 장 보드리야르의 『섹스의 황도』(1993), 에릭 리베르주의 『미지의 시간 속으로』(2009), 베르나르 이슬레르와 장-클로드 카리에르의 『루브르의 하늘』(2010), 크리스티앙 뒤리외의 『매혹의 박물관』(2012)이 있다.

예술작품에 깃든 비극적 영혼을 깨우다—역자 해설
역주

스물두 편의 ‘루브르의 유령’ 이야기
알로이시아스 알레브라토스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
안토니오 디 아퀼라 〈리자 제라르디니의 초상화,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일명 모나리자, 라 조콘다 혹은 라 조콘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엔헤두아나 아르위-아 〈함무라비 법전비〉
아르주나 아세가프 〈마르쿠스 섹스투스의 귀환〉 피에르-나르시스 게랭 남작
아날리아 아벨라네다 〈프랑스 왕, 성 루이와 시동〉 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일명 엘 그레코
아모제 셉세세트 〈남자의 두상〉
제이나바 붉은 방
마르쿠스 뒤드케 대령 대회랑
랑텔므 푸아슈 〈묘지의 고아 소녀〉 외젠 들라크루아
야코뷔스 그로벤도에커 〈도마질하는 어물전 상인〉 프란스 스니데르스 (기법으로)
헤카베 코린트 양식의 투구
멜랑콜리아 라스니 〈예술가의 초상〉 알브레히트 뒤러
즈보니미르 카라카세빅 〈옷 벗은 볼테르〉 장-바티스트 피갈
라크셰크 〈사람 얼굴을 가진 날개 달린 황소〉
롱기누스 〈죽은 그리스도〉
마르파다 〈말의 머리〉
카이우스 리비우스 막시무스 〈침대〉
벨라 데 몬테팔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앞에 나타난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와 파올로 말라테스타의 유령〉 아리 셰페르
리우비노 누즈리 규방 침실
레고데세베스 쌍둥이 〈델 카르피오 성(城) 백작부인이자 라 솔라나 성 후작부인〉 프란시스코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
빌럼 툼펠트 〈가죽 벗긴 소〉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 레인
두라 지메네즈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녀의 자매 빌라르 공작부인으로 추정되는 초상화〉

수록작품 배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