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屋의 壁

벽이 품은 자연의 아름다움
국토의 칠십 퍼센트가 산지山地인 우리나라 자연환경에서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취락 입지가 보편적이다. 이는 오랜 세월의 경험에 비추어 수세水勢 좋고 산세山勢 뛰어난 땅에 좌향坐向을 가려 살고자 하는 생활과학에서 비롯된 선조의 자연관이자 지리관이었다. 이같은 자연관은 살 집의 위치를 정할 때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 무엇보다 지세地勢에 잘 적응하도록 하였으며 건물의 모습도 배경이 되는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도록 했다. 우리의 전통 주거 양식인 한옥은 이처럼 자연과의 조화를 무엇보다 중요시한 건축물이다.
역사학자 차장섭車長燮 교수는 한국 가족사家族史 연구를 위해 전국에 산재한 종가宗家를 조사하다 이처럼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자리한 한옥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자연에 대항하지도 않고 압도되지도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녹아들듯 자리한 한옥이 저자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저자는 오랜 시간 인문학적 관점에서 종가의 역사나 건축구조, 문화 등을 글로 풀어내는 한편, 사진으로도 기록해 왔다. 전작 『선교장船橋莊』이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 상류주택의 건축과 문화, 집안 사람들의 경영철학 등을 직접 찍은 풍부한 사진 자료와 함께 다각적으로 탐구했다면, 이 책 『한옥의 벽』은 전통가옥의 벽에 드러난 조형미를 사진으로 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부러질 듯이 심하게 구부러져 있거나 굵었다가 가늘어지는 나무도 어엿한 기둥이 되어 주춧돌 위에 세워졌고 그 생김 그대로 흰 벽 위에 남았다. 각양각색의 고택만큼이나 다양한 표정을 지닌 한옥의 외벽에도 자연미自然美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400여 고택을 직접 찾아다닌 저자는 강원 강릉 선교장船橋莊, 경기 명성황후 생가, 전남 순천 낙안읍성 고가, 경북 안동 학암고택 등 48 가옥을 엄선하여 한옥의 건물 외벽과 내벽, 방 안의 벽면 등을 85컷의 사진으로 담아냈다.

비대칭, 자유로운 면 분할, 여백의 미학
저자는 한옥 벽의 특징으로 ‘비대칭’과 ‘자유로운 면 분할’, 그리고 ‘여백의 미와 단순미’를 꼽았다. 한옥의 벽은 좌우 대칭을 이루는 벽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언뜻 대칭처럼 보이는 벽면이라도 소품 설치 등을 통해 경직되고 긴장감을 주는 대칭은 피하고자 했다. 경북 문경의 장수황씨長水黃氏 종택 대청 벽면의 경우 오른쪽 벽에는 같은 문 세 개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지만, 왼쪽 벽에는 기둥을 중심으로 문 두 개를 냈을 뿐이다.(pp.62-63) 벽면의 분할뿐만 아니라 문의 크기와 모양도 다르다. 비대칭은 균형감을 상실하여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으나, 한옥의 벽은 자연스런 균형과 비례감이 느껴진다. 이는 다양한 모습의 벽과 문이 만들어내는 공간 구성을 통해 경쟁과 긴장이 아닌, 서로 감싸 안는 조화를 이루기에 가능한 일이다.
다음으로 자유로운 면 분할을 들 수 있다. 흰 회벽을 바탕으로 짙은 색 기둥과 보가 가로세로 그어지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문이 자리를 잡는다. 기둥이 만들어내는 선만으로 크고 작은 면들이 강약의 리듬을 타듯 나뉜다. 이같은 면 분할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정갈하고 담백하다. 한옥 벽면에는 소박하지만 변화무쌍한 우리의 삶도 같이 묻어난다. 큰 문과 작은 문이 마치 어미가 새끼를 끼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있는가 하면, 두 개의 문이 부부의 연을 과시하듯 다정하게 자리하는 경우도 있고, 세로로 긴 문과 가로로 누운 문이 묘한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마치 한옥에 살고 있는, 자유로우면서도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는 가족들의 면면을 연상시킨다.
마지막으로 한옥의 벽은 여백의 미와 단순미를 자아낸다. 여백餘白은 단순히 비어 있음을 뜻하는 공백空白과는 구분된다. 아무런 꾸밈없는 흰 벽이지만 쓸쓸하지 않고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것은, 언제나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가장 단순한 흑黑과 백白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색을 더하면 흑이 되고, 모든 색을 빼면 백이 된다. 모든 선을 단순화하면 가로 선과 세로 선만 남는다. 몬드리안P. Mondrian은 삼원색을 사용해, 그리고 가로 선과 세로 선을 결합해 형태를 단순화했다. 한옥 벽의 가로와 세로 선의 결합은 몬드리안과 동일하지만 색은 흑백뿐이다. 서양화가 원색의 유화라면 우리 미술은 흑백의 수묵화인 것이다.
서양에서는 인간이 도전을 통해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동양에서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 즉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산들이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흐르고 그 사이로 계곡이 같은 모양의 물길을 만든다. 이를 따라 한옥도 자연스런 구성을 띤다. 자연과 인간, 한옥은 한데 어우러져 존재한다. 그리고 한옥의 벽면에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표현되어 있다.

사진집 출간과 더불어 차장섭 사진전 「韓屋의 壁」이 서울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2016. 7. 13-19), 서울 창성동 온그라운드 지상소(2016. 8. 3-23), 강릉시여성문화센터 대전시장(2016. 9. 23-29)에서 순차적으로 열릴 예정이다.

언론매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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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차장섭 (저자)

차장섭車長燮은 1958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인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을 마쳤다. 조선사연구회 회장을 지냈으며, 강원대학교에서 도서관장, 기획실장, 강원전통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강원대학교 삼척캠퍼스 교양학부 교수로 한국사, 한국미술사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후기 벌열 연구』(1997), 『고요한 아침의 땅, 삼척』(2006), 『선교장』(2011), 『자연과 역사가 빚은 땅, 강릉』(2013) 등이 있다. 사진전으로 「선교장—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집 이야기」(2011) 개인전을 가졌으며, 「마인드·이미지」(2008), 「강원도 사진가 초대전」(2008), 「공간」(2009), 「사진 새 옷을 입다」(2013), 「화和」(2015)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저자/역자의 다른 책들

자연에 순응하는 건축, 한옥
Nature-Friendly Architecture, Han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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