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의 초상

현존하는 부재의 자리

2017년이라는 새해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는 다른 세계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살던 안토니의 집에는 슬픔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그의 무게가 고스란히 실렸던 의자는 주인을 잃어버렸다. 어쩌면 그는 가벼워진 무게만큼이나 다른 이들에게 돌아갈 몫을 생각하며 만족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그의 문장들을 읽으며 공감하고 연대하며 그렇게 그를 다시 불러내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그를 떠나보내자마자 출간되는 두 권의 책이 그러한 매개가 될 것이다. 존 버거의 평생 동지였던 사진가 장 모르(Jean Mohr)가 오십 년 동안 찍은 존 버거의 초상사진집 『존 버거의 초상(John by Jean)』과 존 버거의 마지막 에세이집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Confabulations)』는 그를 기억하고 다시 한번 만나게 할 것이다. 시인 기형도가 죽었을 때 문학평론가 김현이 이를 두고 ‘현존하는 부재’라 표현했듯이, 존 버거의 육신은 소임을 마치고 땅으로 돌아갔으니 ‘부재’하지만 그가 남긴 글은 이곳에 ‘현존’하는 것이다.

존 버거의 초상

사진가 장 모르와 작가 존 버거는 창의적 협력자이자, 오십 년 넘게 우정을 이어 온 막역한 사이였다. 『행운아』 『말하기의 다른 방법』 『제7의 인간』과 같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동시에 독자와 평단의 극찬을 받은 책들을 함께 만들었다. 이 책은 1960년대부터 찍은 수백 장의 사진에서 장 모르가 직접 가려 뽑아 친구에게 바친 일종의 헌사로, 미술비평가, 화가, 소설가, 농부로서의 모습과 더불어, 그를 중심으로 한 가족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반세기 동안 제한 없는 특권을 부여받은 장 모르만이 완성할 수 있는, 위대하면서도 평범했던 한 작가의 꾸밈없는 기록이다.

장 모르가 찍은 149컷의 사진들에는 시골살이와 가족, 글쓰기, 예술에 이르는 영역에서 드러나는 그의 내밀한 일상이 담겨 있다. 사진가이자 친구였던 장 모르의 시선에 비친 존 버거는 영락없는 농사꾼이었다. 우리네 농사꾼이 그러하듯 농번기면 곡괭이를 들고 나가 감자밭에서 일을 했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건초 더미를 날랐다. 도시인들에게는 냄새나는 거름이 농부들에게는 땅을 기름지게 하는 귀중한 자양분이었고, 가축들에게 먹일 식량을 헛간 가득 채울 때마다 마음도 푸근해졌다. 농사꾼으로서의 존 버거는 장 모르와 함께 논의를 거듭하며 『말하기의 다른 방법』의 지면 배치를 고민할 때의 모습과 같았다. 글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한결같은 정성과 땀으로 최선을 다하는 농부의 하루를 살았던 것이다.

또한 그는 애정 깊은 아버지이기도 했다. 어린 아들 이브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거나 산을 오르며 자연을 만끽하는 그들 사이에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그래서인지 캥시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찍은 사진들에는 아버지를 찾아온 아이들의 모습이 부쩍 많이 눈에 띈다. 그는 며느리에게도 오토바이의 뒷자리를 스스럼없이 내어주는 이였다. 어린 이브를 목마 태우는 모습, 딸 카트야와 함께 야외 낭독회를 진행하는 모습, 아들 제이콥의 결혼식에 참석한 모습, 손녀인 멜리나에게 휴대폰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보여 주는 모습 등 아이들과 함께한 사진들에서는, 토론을 하거나 글을 쓸 때의 예리한 눈빛과 다른, 존 버거의 부드러운 표정을 엿볼 수 있다.

그밖에도 칠십 세 생일에 춤을 추는 모습, 크레용이나 붓으로 드로잉하는 모습, 벤치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모습, 다양한 손짓으로 대화하는 모습 등을 가까이에서 담아냈다. 시골 농촌 마을로 옮겨 가 살면서 고된 농사일과 글쓰기를 병행한 존 버거의 지극히 사적인 시간들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올올이 묻어난다.

 

 

장 모르 (저자)

장 모르(Jean Mohr, 1925- )는 스위스 제네바 출신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제네바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고 파리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공부한 뒤 서른 살이 되어서야 직업 사진가가 되었다. 초기에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사업기구, 세계보건기구 등 세계인권기구들과 함께 일했다. 존 버거와 『행운아』 『제7의 인간』 『세상끝의 풍경』 『말하기의 다른 방법』 등을, 에드워드 사이드와 『마지막 하늘이 지난 후』를 공동작업했으며, 오십 년에 걸친 팔레스타인 난민 기록에 대한 회고록 『나란히 또는 마주보며』를 냈다. 1964년에는 동시대 주요 스위스 예술가 오십 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고, 1978년 쾰른에서 인권 문제에 참여도가 높은 사진가에게 주는 상, 1984년에는 로잔에서 연 전시회 「그것은 내일이었다」로 현대사진가 상을, 1988년에는 제네바 조형예술 상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신해경 (역자)

『존 버거의 초상』을 번역한 신해경(辛海京)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KDI국제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공공정책학(국제관계) 석사과정을 마쳤다. 생태와 환경, 사회, 예술, 노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혁명하는 여자들』, 『사소한 정의』, 『아랍,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버블 차이나』, 『덫에 걸린 유럽』, 『침묵을 위한 시간』, 『북극을 꿈꾸다』,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등이 있다.

차례 

존 버거의 초상
책 머리에—장 모르
사진
장 모르: 어느 초상화를 위한 한 장의 스케치—존 버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