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현존하는 부재의 자리

2017년이라는 새해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는 다른 세계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살던 안토니의 집에는 슬픔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그의 무게가 고스란히 실렸던 의자는 주인을 잃어버렸다. 어쩌면 그는 가벼워진 무게만큼이나 다른 이들에게 돌아갈 몫을 생각하며 만족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그의 문장들을 읽으며 공감하고 연대하며 그렇게 그를 다시 불러내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그를 떠나보내자마자 출간되는 두 권의 책이 그러한 매개가 될 것이다. 존 버거의 평생 동지였던 사진가 장 모르(Jean Mohr)가 오십 년 동안 찍은 존 버거의 초상사진집 『존 버거의 초상(John by Jean)』과 존 버거의 마지막 에세이집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Confabulations)』는 그를 기억하고 다시 한번 만나게 할 것이다. 시인 기형도가 죽었을 때 문학평론가 김현이 이를 두고 ‘현존하는 부재’라 표현했듯이, 존 버거의 육신은 소임을 마치고 땅으로 돌아갔으니 ‘부재’하지만 그가 남긴 글은 이곳에 ‘현존’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오랜 시간 동안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것은 무언가가 말해질 필요가 있다는 직감이었다.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 나는 스스로 중요한, 혹은 전문적인 작가라기보다는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화상」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중에서

만년에 이른 존 버거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깊어진 눈매만큼이나 진하게 패인 주름과 하얗게 물결치는 머리털이 그간의 세월을 그러안고 있다. 그리곤 이 길에 들어선 이후 무수히 듣고 답했을 질문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나는 왜 쓰는가?”

그는 호칭된 작가(writer)보다 떠돌이 이야기꾼(storyteller)이 더 어울렸다. 경계를 넘나들며 일상을 다양한 각도로 잘라 보여 줬던 그의 이야기는 과격할 정도로 도전적이고, 비판적이었으며 다정하고도 온화했다. 그건 아마도 그가 이야기꾼이기 전에 훌륭한 관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리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영장의 유리 지붕에 떠 있는 새털구름, 플라멩코 무용수의 흑백사진은 그에게로 와 새롭게 씌어졌다.

그는 노래하는 새들이 그려진 성냥갑을 가지고 있던 폴란드인 친구 자닌과, 사십대까지 절도죄 등으로 감옥을 드나들다가 그림을 그리게 된 마이클 콴의 손을 끌어 무대로 안내했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렇게 이 책의 독자들은 코마키오의 구월 광장에 모여 발을 구르며 콧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고, 아랍어로 노래하는 야스민 함단(Yasmine Hamdan)의 공연에 초대되며 눈, 입술, 볼, 손가락으로 대화하는 청년들을 만날 수 있다. 존 버거는 영국 작가 저넷 윈터슨(Jeanette Winterson)의 말대로 “화가가 물감을 다루듯이 생각들을 다루고”, 빈 곳을 다채로운 색감으로 물들였다.

11편의 짧거나 긴 에세이들에는 그의 드로잉과 메모, 회상은 물론, 알베르 카뮈부터 전 세계적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사려 깊은 생각이 담겨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놓지 않고 소리내어 부르려 했던 이름 없는 대상들은 그가 피워 놓은 모닥불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마른자리와 따뜻한 담요가 있는 그곳에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노래와 춤과 눈물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오늘처럼 바람이 짙어진 계절, 그는 한 걸음 앞선 시공간에서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존 버거 (저자)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는 런던 출생으로,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처음 미술평론으로 시작해 점차 관심과 활동 영역을 넓혀 예술과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깊고 명쾌한 관점을 제시해 왔다.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농촌 마을로 옮겨 가 살면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해 왔다. 저서로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예술과 혁명』 『다른 방식으로 보기』 『본다는 것의 의미』 『말하기의 다른 방법』 『센스 오브 사이트』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모든것을 소중히하라』 『백내장』 『벤투의 스케치북』 『아내의 빈 방』(공저) 등이 있고, 소설로 『우리 시대의 화가』 『그들의 노동에 함께 하였느니라』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G』 『A가 X에게』 『킹』 등이 있다.

김현우 (역자)

김현우(金玄佑)는 1974년생으로,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비교문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교육방송(EBS)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역서로 『웬디 수녀의 유럽 미술 산책』 『스티븐 킹 단편집』 『행운아』 『고딕의 영상시인 팀 버튼』 『G』 『로라, 시티』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A가 X에게』 『벤투의 스케치북』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 노트』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그레이트 하우스』 『우리의 낯선 시간들에 대한 진실』 『킹』 『아내의 빈 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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