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한 사랑

“그대의 나이 구십이라고 / 시계가 말한다 / 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 //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 내가 대답한다 /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 그러나 잠시 후 / 나의 대답을 수정한다 / 사랑과 재물과 / 오래 사는 일이라고 // 시계는 / 즐겁게 한판 웃었다 / 그럴 테지 그럴 테지 / 그대는 속물 중의 속물이니 / 그쯤이 정답일 테지… / 시계는 쉬지 않고 / 저만치 가 있다” ─ 김남조, 「시계」 전문

지난 9월 26일, 90세 생일을 맞은 김남조金南祚 시인이 자신의 18번째 시집을 열화당에서 출간했다. 지난 4월 정지용문학상을 받게 된 수상작 「시계」를 비롯하여 신작 63편이 수록되어 있다. 2013년 낸 열일곱번째 시집 『심장이 아프다』 이후 4년 만이다.

문학출판사가 아닌 열화당에서 시집을 낸 사연은 이렇다. 시인은 오래 전부터 열화당의 책들을 보면서 그 내용과 만듦새가 무척이나 좋았고, 또한 책이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출판에 임하는 열화당의 자세를 눈여겨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열화당에서 자신의 시집도 내기를 희망하던 차에 이번 시집 원고가 완성되어 출판이 성사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열화당 이기웅 대표가 사단법인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를 이끌면서 추진하고 있는 ‘안중근기념 영혼도서관’에 김남조 시인이 주목하면서, 이 도서관에 자신의 시집도 한 권 꽂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이 역시 열화당 출판 결심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시인이 첫 시집 『목숨』을 낸 것은 1953년이었다. 따라서 그는 64년째 시작詩作 생활을 이어 가고 있는 명실상부한 한국 시단詩壇의 최원로 시인이다. 그는 “십 년 전쯤부터 이제는 시를 그만 쓰고 다른 사람이 쓴 좋은 시나 책을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를 보고,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면 자꾸만 마음속에서 시심詩心이 일어나고, 또 시구詩句가 떠올라서 시 쓰기를 멈출 수가 없었어요”라고 토로했다. 또한 이번 시집 머릿글에서 “나는 만년의 으스름 저문 날을 살면서도, 보고 느끼고 깨닫고 감동하는 바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쓰고 있으니, 말하지 않은 창작의 고통도 있었겠지만 그가 ‘천생 시인’임은 분명하다.

시인은 또한 머릿글에서 “삶의 본질, 그 의미심장함과 이에 응답하는 사람의 감개무량함, 살아가면서 더디게 성숙되어 가는 경건한 인생관, 이 모두 오묘한 축복이며 오늘 우리의 감사이자 염원입니다. 『충만한 사랑』의 글들을 쓰면서 이러한 생각들이 떠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내고 싶습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삶에 대한 강한 긍정과 함께, 그 사랑의 충만함이 계속되기를 마음속 깊이 염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詩에의 순교, 순교적 시詩 

“예수님께서 / 순교현장의 순교자들을 보시다가 / 울음을 터뜨리셨다 / 나를 모른다고 해라 / 고통을 못 참겠다고 해라 / 살고 싶다고 해라 // 나의 고통이 부족했다면 / 또다시 십자가에 / 못 박히련다고 전해라” ─ 김남조, 「순교」 전문

막 나온 시집을 두고 시인의 90세 생일날에 맞추어 파주출판도시 열화당에서 작은 모임이 열렸다. 주인공인 김남조 선생과 문학평론가 김주연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최동호 교수, 그리고 열화당 이기웅 대표를 포함한 열화당 식구들이 모여 시인의 90세 생일과 시집 출판을 축하하는 아주 조촐한 자리였다. 김남조 시인은 책을 받아 들자마자 제일 먼저 즉석에서 자신의 「순교」라는 시를 암송했다. 그러고 나서 “누군가 나한테 순교할 수 있겠냐고 물었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이를 꼽으라면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저는 못 할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주연 교수는 “김남조 선생은 시를 통해 순교와 장수 둘 다를 이룬 분”이라고 했고, 최동호 교수는 “이번에 출간된 시집을 보니 김남조 선생의 시가 아직도 강한 긴장과 탄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번 시집은 깊은 사유의 산물이며, 한마디로 김남조 선생은 시에 순교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평했다. 김남조 시인은 ‘시에 순교’했다고, ‘시로써 순교’했다고 할 만큼 그의 ‘사람’과 ‘사랑’에 대한 구도자적 희원이 이번 시집의 시편들 여기저기에 묻어 있으니, 한편으로 그의 시는 가히 ‘순교적 시’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순교하지는 못할 것 같다’와 비슷한 ‘인간적인’ 심정이 「시계」라는 시에서도 읽힌다. 그대의 소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대답했다가도, 금세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 수정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그만큼 김남조 선생은 인간의 실존적 시간을 사유하고, 시간 안에서 유한자有限者로 살아가는 인간을 반성하고 또 긍정해 간다”라고 말하고 있다.

유성호 교수는 “김남조 초기 시편은 생명의 존귀함을 기리는 데 일관되게 바쳐졌다. 첫 시집 『목숨』(1953)으로부터 선생은 인간 상실의 상황을 고발하면서 생명에 대한 외경을 절절하게 보여 주었다. 이러한 초기 시편의 열정적 외침이 후기로 올수록 좀 더 사색적인 휴머니즘의 차원으로 나타났고, (…) 에로스적 사랑과 아가페적 사랑 모두가 선생의 시 전반에 걸쳐 주된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안에는 선생이 지속적으로 노래해 온 고통 속의 치유, 영혼의 사랑 과정이 섬세하고도 선 굵게 담겨 있다”라고 김남조 시세계를 간결명료하게 분석하고서는, 이번 시집 『충만한 사랑』에 관하여 “‘사람’과 ‘사랑’을 절실하게 희원하는 시간들이 미학적 문양紋樣으로 서서히, 충만하게 번져 오는 과정을 이토록 아름답고 절절하고 융융하게 담아내고 있다. 김남조 시학의 극점에서 비추어지는 섬광의 기록이 아닐 수 없다”라고 평하고 있다.

김남조 (저자)

김남조(金南祚)는 1927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숙(星宿)」 「잔상(殘像)」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고, 첫 시집 『목숨』(1953) 이래 지금까지 열여덟 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 외에 다수의 수상집과 콩트집 『아름다운 사람들』(1997) 등이 있다.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책머리에

1
구원 | 순교 | 승천 · 2 | 아버지의 초상 | 망부석 | 눈물 | 나그네 | 개미마을 | 석류 | 그들의 봄 | 우는 사람 | 낙엽

2
천일千日 | 행복 | 상사병 | 성냥 · 2 | 동행 | 햇빛 쪼인다 | 심장 안의 사람 | 거울 | 대륙의 산 | 잘 가세요 | 겨울 초대장 | 사치한 농담

3
학교 | 어머니 | 고요 | 후일後日 | 천금의 찰나 | 빈 의자 | 운명 | 문안 · 2 | 누에 이야기 | 안개 | 완전범죄 | 어둠 | 시간에게

4
주물 | 하느님의 조상 | 기도 연습 | 순국용사들 | 주일 미사 | 낙태아를 위하여 | 지진 | 죄 | 비통 | 차복아 차복아 | 좀 쉰다  | 시계 | 사람 이야기

5
심각한 시 | 젊은 시인들에게 · 1 | 젊은 시인들에게 · 2 | 시 학습 · 1 | 시 학습 · 2 | 노래 | 시지프스의 딸들 | 화가畵家 | 살고 싶은 집 | 판결 | 행간의 스승 | 간절하다 | 누구인가

사람과 사랑을 마음 깊이 희원하는 시간들 · 유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