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화당이 걸어온 길

2. 미술 출판사로서의 토대 구축기 1975-1982

1975년부터 시작된 ‘미술문고’의 출판, 그리고 1977년 ‘미술선서’의 출판 등 오랫동안 구상해 온 미술 출판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 그에 대한 결실이 맺어져 가시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기간을 1980년대초까지로 잡은 것은 1981년 들어 ‘미술문고’가 거의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미술문고’라는 하나의 시리즈가 일관된 자기 형식과 내용을 갖추었고, 또 이것이 미술 대중의 필요에 적극 부응하면서 그 실체를 인정받았다.

1. ‘미술문고’ 발간으로 시작된 미술전문 출판사 열화당

1971년 출판의 길에 들어설 때부터 옛 서적 복각 작업 등 여러 시도를 하면서 스스로의 자리를 모색해 온 열화당은, 발행인이 그 이전부터 끊임없이 주목해 온 ‘미술’이라는 전문 영역의 기획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집중하면서 서서히 출판사 성격의 입지를 굳혀 왔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출판사의 색깔과 방향을 결정지은 책들, 즉 이때 활발하게 만들어진 ‘미술문고’를 출판사의 얼굴로 꼽을 수 있다. 이때부터 비로소 미술전문 출판사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당시의 출판 환경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모험이었다. ‘미술’이 소설이나 에세이 등 대중적 독자층을 확보한 분야도, 인문학 등과 같이 그리 많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고정 독자를 확보한 분야도 아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다른 출판사가 주목하여 전념한 분야나 주제가 아닌, ‘미술’ 분야의 책을 꾸준하게 출판해 왔다. 이것이 어느 정도의 독자를 확보하면서 ‘열화당은 미술전문 출판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열화당은 독자들에게 ‘미술문고’로 자신의 탄생을 알린 것이며, 그것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1975년부터 시작된 ‘열화당 미술문고’는 그 전까지 인문 교양 영역에서 소홀히 취급되어 온 시각예술을 본격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부각시켰다는 데에서 우선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고라는 형식 속에, 미술 전반에 걸친 내용을 특정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있게 아우르고 있어, 미술문화의 대중적 보급을 지향하고 그것을 실제로 시도한 본격적인 대중적 미술 출판이라고 평가된다. 또 70년대 상황에서도 본격적인 미술 출판이 가능하다는 기대를 미술 저술가들에게 갖게 해, 광범위한 저술가층을 확보하고 또 그것을 적극적으로 창출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1985년까지 10여 년 간 67권에 달하는 미술문고가 간행되었는데, 미술문고 다섯 권을 처음 선뵀을 때,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책이 나오게 되었는가?” “이런 출판이 가능한가?” 하고 놀라는 찬탄의 소리를 여러 식자층으로부터 들었다. 그 목록에는 미켈란젤로・고흐・고갱・피카소・칸딘스키・클레・고야・루오 등의 서양 화가들, 정선・변관식・박수근 등의 국내 화가들, 팝 아트나 초현실주의 등 미술이론을 다룬 책들, 거기다가 『김현의 예술기행』, 고유섭의 『우리의 미술과 공예』 등까지 담고 있어, 미술에 관한 한 거의 모든 분야와 범위를 망라했다고 할 수 있다.
‘열화당 미술문고’는 90년대 출판 환경에 발맞추어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혁신을 이룬, 새로운 미술문고로 계승되어 그 맥을 이었다. 이것은 ‘미술의 대중화 모색기(1994–1999)’에서 더욱 자세하게 소개된다.

2. 전문 미술책들의 보고, ‘열화당 미술선서’

전문적인 지식은 어느 순간에 단숨에 체득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궁리와 탐구, 그리고 체계적인 공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광대한 지식의 바다에서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면 그 답을 선뜻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마찬가지 이유로 출판 분야에서 단번에 미술전문 출판에 관한 모든 것을 갖춘다는 것은 그저 욕심이나 바람에 그칠 뿐이며, 실제로는 공허한 관념에 불과할 것이다.
‘열화당 미술선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회적이나마 하나의 대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977년부터 출판된 미술선서는 곰브리치가 쓰고 최민이 옮긴 『서양미술사』(미술선서 1・2)를 시작으로 하여 다루는 미술의 범위를 조각・건축・사진 등으로 넓혀 갔다는 점, 또한 동서양미술뿐 아니라 한국미술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과 규명을 시도한 점 등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가장 먼저 서양미술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를 꼽을 수 있는데, 우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잰슨의 『회화의 역사』(미술선서 36)와 함께 미술 입문을 위한 필수 교양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 왔는데, 1994년에는 번역을 다듬고 원색도판들을 배치한 개정판의 발간으로 일반대중의 미술에 대한 심미안을 넓혀 주었으며, 여러 대학에서 교재로 꾸준히 채택되는 등 미술선서 첫 권으로 내용과 판매 면에서 제몫을 다했다. 저자 곰브리치는 미술사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미술사의 이해는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안들 중에서 특정한 대안이 선택된 상황을 재구성하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책은 이집트에서 현대까지, ‘전 시대 미술양식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 해결을 위한 시도들의 연속’이라는 입장에서 저술되었다. 하지만 하나의 이론이나 입장이 대중들의 폭넓은 사랑 아래 놓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담아내는 언어 또한 큰 몫을 차지한다. 특히 그 내용이 우리말이 아닌 외국어로 씌어져 있어 번역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경우에는 번역자의 역할이 원래의 저자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 책 『서양미술사』는 崔旻이라는 뛰어난 역자를 만나 비로소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년여에 걸쳐 완성된 이 책은 역자의 평소의 번역관인 “직역을 해서 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오역”이라는 소신에 걸맞게 유려하면서도 정확한 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책은 예술 관련 책의 번역에서 하나의 전형으로 평가될 만한 명성을 얻었다. 좋은 원서가 좋은 번역자를 만나 서로를 빛낸 행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곰브리치의 또 다른 저서 『예술과 환영』(미술선서 61)은 심리학적 접근을 통해 미술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한 대표적인 저작물로, 미술에 좀더 전문적인 안목과 지식을 바라는 미술독자들의 요구에 호응하여 준비되었다.
또 추상미술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칸딘스키의 예술론을 집약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미술선서 20)와 『점・선・면』(미술선서 35)을 펴냈으며, 바슐라르의 『꿈꿀 권리』(미술선서 28), 들라크루아의 미술세계를 조명한 보들레르의 『화가와 시인』(미술선서 22),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미술선서 56), 그리고 허버트 리드의 『현대미술의 원리』(미술선서 30), 『도상과 사상』(미술선서 31), 『조각이란 무엇인가』(미술선서 39) 등을 예술 일반에 관한 대표적인 출판물로 내세울 수 있다. 또한 건축에 관한 저명한 책인 지오 폰티의 『건축예찬』(미술선서 23)과 하싼 화티의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미술선서 64), 사진에 관한 일반 지식과 그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안내를 해주는 『사진예술개론』(미술선서 52), 『세계사진가론』(미술선서 62), 『사진의 역사』(미술선서 60) 등의 책이 인상적이었다. 거의가 서양의 고전급 미술이론서의 번역 출판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는데, 이 점은 국내 저자에 의한 서양미술의 주체적 이해와 소개의 필요성이라는 과제를 던져 준다.
또 논의와 소개가 서양 쪽에만 머물지 않고 중국, 일본 등을 포함한 동양 쪽으로도 확대되었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데, 『중국예술의 세계』(미술선서 3), 『일본미술사』(미술선서 11), 『중국회화사』(미술선서 17), 『동양화 일천년』(미술선서 18), 『동양미학』(미술선서 43), 『중국예술사』(미술선서 46), 『중국도자사』(미술선서 51) 등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문화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으로는 신영훈의 『한국의 살림집』(미술선서 37・38), 이종석의 『한국의 목공예』(미술선서 41・42), 문명대의 『한국조각사』(미술선서 27)와 『한국의 불화』(미술선서 6) 등을 들 수 있다.

3. 논쟁적인 미술론을 담아낸 무크 『시각과 언어』

복제된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산업시대 속 우리들의 삶은, 그것들이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에 침투해 자신을 강요하고 또한 설득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 잠겨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회화를 중심으로 고착된 전통 미술—唯一性, 稀少性, 手工性 등을 특징으로 하는—의 저항에 직면해, 그 미술의 바깥을 배회하며 자기 세력을 끊임없이 확장해 가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결국 그러한 대립 양상은 현실적 실체로 우리 의식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즉각 소비하고 폐기하는 이미지와 영구히 보존하고 우러러보아야 하는 이미지, 이렇게 차별적으로 나누어 보려는 태도는 이 시대 시각문화의 구체적인 현실을 똑바로 보지 않으려는 데서 나오는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두 미술은 교묘한 방식으로 서로를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는 공생의 관계로도 현상된다. 즉 오늘날 존재하는 상징적 문화는 표면적으로 대량생산체제를 거부하면서도 뒤쪽으로는 은밀하게 결탁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그 문화는 세속적이면서 위선적이고 배타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상에 대한 솔직한 검토와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산업사회와 예술’이라는 부제 아래 무크 『시각과 언어』 1은 이런 이미지들의 혼란과 착종 속에서 그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해석하려는 목적 아래 씌어졌다.
여기에는 「(미술) 수용의 현실과 (그것에서의) 소외」(원동석), 「미술중개기관의 사회학」(한스 페터 투른), 「미술관과 대중」(반 덴 하아크), 「산업화 바람 속의 예술문화」(김인환), 산업시대의 미학과 인간을 다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김우창), 「광고이미지와 소비문화」(존 버거), 「현대미술과 사진」(이일), 「플라톤의 동굴에서」(수전 손탁), 「사진과 현실」(성완경) 등의 논문과, ‘미술의 순수성과 현실의식’이라는 제목 아래 열린 좌담 등이 들어 있다.
낱낱의 글들은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또 그것이 공고해지면서 형성・발전된 이미지 환경에 대해, 또 전통 시각미술과 새로운 시각미술의 혼재 속에서 그 각각에 대해 자리매김하고 둘 사이의 관계 규명을 시도하고 있어, 산업사회에서의 이미지 읽기라는 현실적 과제를 충족시키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과 비평’이라는 부제 아래 1985년에 나온 『시각과 언어』 2 는 현대미술과 비평, 오늘의 한국미술과 비평의 현실, 미술 정보의 생산과 유통 구조의 분석, ‘오늘의 한국 현대미술과 비평의 새로운 인식’을 주제로 열린 좌담,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 비평 문헌 목록을 자료로 담고 있다.
‘시각과 언어’ 시리즈는 80년대 초반에 활발하게 전개된 무크지들의 만개에 발맞추어 순발력있게 대응해 무크지 시대를 여는 데 일조했으며, 또한 미술이라는 매개를 중심으로 (미술) 현실과 환경을 분석 규명하고 있어 산업사회에서의 이미지 독해 방법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