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화당이 걸어온 길

4. 미술의 대중화 모색기 1994-1999

이 시기는 미술의 대중화, 특히 책을 통해 미술의 구체적인 보급과 확산을 기대하고 그것을 ‘미술문고’의 확대・개편에서 찾으려 한 시기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또 그 동안 다양한 미술적 접근을 통해 확보한 기본적인 인식에 체계성을 부여하는 과정이 덧붙여진 시기이다. 이것은 이후 ‘영상원총서’ 등 영화론에 집중하는 것 등의 형태로 표출된다. 한편 출판사의 이름이 유래한 열화당은 수많은 書畵와 典籍 들이 收藏되어, 많은 이들이 技藝를 즐기고 진리를 탐구하던 전통을 지녔고, 출판사 열화당은 그것을 직・간접적인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선교장가족 사진집』 『강릉 선교장』 등의 책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 시기에는 한 차례의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저작권의 전면적인 적용으로, 그 동안 보호를 받아 왔던 다수의 번역서들을 이제는 정식 계약을 맺고 출간해야 했다. 물론 몇 년 전부터 거기에 대비하고자 애썼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은 많았다.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전집’에 묶여 계약을 체결한 경우도 있었고, 또 그 당시 시점에서 보아 더 이상 출간이 불가능할 정도의 판매를 보인 책도 있어, 일대 결단이 필요했다. 설상가상으로 국내 실정에 맞지 않는 고액의 도판 사용료 요구는 더 이상 일이 진전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이때 『서양미술사』를 포함한 100여 종에 달하는 책들을 절판할 수밖에 없었다. 열화당으로서는 중요한 시련기이자 한편으로는 전환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1999년에는 그 동안 정례적으로 참가해 왔던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본격적으로 준비하여 참가하게 된다. 한국관에서 가장 큰 부스를 마련해 우리 책의 아름다움을 한껏 보여 주고자 했으며, 그 준비의 하나로 몇 개월에 걸쳐 영문 도서목록을 제작했다. 여기에는 열화당의 대표작들이 총망라되어 있는데, 이것은 외국에 우리 출판물을 알리고 또 저작권 수출까지도 예감하게 하는, 국내 출판계에서는 중대한 ‘시도’였다. 당시 출간예정이었던 『韓國 樂器』와 『法空과 莊嚴』은 가제본을 제작하여 해외 시장에서 먼저 선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 악기』 포스터와 宋河璟 교수의 필체로 제작한 ‘悅話堂’ 현수막 또한 한국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책으로는, 그 동안 정치적 이유로 묶여 있었던 월북화가 이쾌대의 사실적이고 민족적인 미술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명한 화집 『李快大』, 한국미의 근원을 심도있게 조명한 세 권의 저서들, 즉 미술사학자 김원용 박사의 3주기에 맞추어 출간된 『한국미의 탐구』(개정판), 미학자 조요한 박사의 『한국미의 조명』, 미술사학자 강우방 교수의 수상록 『미술과 역사 사이에서』, 실크로드 미술에 관한 권영필 교수의 20여 년에 걸친 학문적 천착과 거기서 이루어진 성과를 담아낸 『실크로드 미술』, 한국 근대미술사 관련 연구서가 변변치 않은 현실에서 미술평론가 최열이 5년여에 걸친 방대한 자료수집 결과 이루어낸 최초의 한국근대미술사 지도인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장욱진의 예술 일대기와 먹그림, 매직그림 등을 하나하나 조명한 김형국 교수의 『장욱진』 『장욱진 먹그림』 『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 조각가 최종태의 작품집과 예술 에세이인 『최종태 교회조각』 『나의 미술, 아름다움을 향한 사색』, 조선시대 畵聖으로까지 일컬어졌던 김홍도의 삶과 예술을 온전히 복원시킨 미술사학자 오주석의 『단원 김홍도』, 동아시아 문화의 정체성 확인과 생산적인 동아시아 담론의 장으로서 창간한 동아시아문화포럼(회장 송하경)의 『동아시아 문화와 사상』(반년간지) 등을 들 수 있다.

1. 새롭게 변화된 ‘열화당 미술문고’

1990년대에 들어와 바뀐 시대 분위기에 따라 ‘열화당 미술문고’는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요인은 첫째로, 미술 자체가 예전처럼 소수의 독점적 교양물이 아니라 생활인들의 일상적이고 친근한 교양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로는 이미지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면서 책의 개념도 활자에 의한 정보 전달에서 이미지를 통한 시각적인 정보 전달의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는 점이다. 또 이제 도판은 단순한 양념 역할이 아니라 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인식을 갖게 된 점이다. 그런 이유들로 문고판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이같은 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미술문고가 구상되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 동안 간행된 70여 권에 이르는 책 중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고 유효한 주제와 내용을 선별해 거기에 새로 손질을 가하고 또 적절한 원색 도판들을 적극적으로 배치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현대미술의 상실』 『달리와의 대화』 『아동의 미술세계』 『초현실주의』 『드가・춤・데생』 『미술과 상징』 『노아 노아』 『피카소의 게르니카』 『막스 에른스트』 『도미에의 사법풍자화』 『세잔느의 회상』 『동 키호테의 탈출』 『툴루즈-로트렉』 등의 10여 권이 여기에 해당한다. 특히 『드가・춤・데생』은 원래 문학평론가 김현이 번역한 것인데 그 동안 역자가 세상을 떠나 사후에 재출간된 사연을 안고 있고, 『도미에의 사법풍자화』는 원래 ‘법과 예술’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던 것이 저자가 비슷한 제목의 책을 따로 준비하는 바람에 아주 다른 제목을 달게 된 사정을 가지고 있다.
초기에는 다섯 권씩을 한꺼번에 간행했는데, 이는 가장 짧은 시간에 미술문고가 독자들의 의식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도록 하자는 의도에서였다. 물론 먼저 출판된 책이 모두 번역서에 치우쳐 있고, 또 이미 나왔던 책들을 다듬은 것이어서, 완전한 새로움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기도 한데, 이런 이유로 초기의 1년여 남짓 되는 시간은 새로운 내용을 준비하기 위한 예비기, 혹은 실험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본격적으로 국내 저자에 의한 책들이 연이어 출판되기에 이른다. 장소현의 『에드바르트 뭉크』, 오광수의 『김환기』, 김형국의 『장욱진』, 손세관의 『북경의 주택』, 이영준의 번역서 『중국의 얼굴』(나이젤 카메론 외 지음), 최태만의 『미술과 도시』, 그리고 ‘만화’에 대한 비평적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한국 만화의 역사』 『한국 만화의 선구자들』 『한국 만화의 모험가들』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특히 만화에 관한 몇 권의 책은 그 동안 예술의 변방에 머물렀던 만화와 만화가 들을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토대를 마련했고, 뒤이어 단행본용 만화의 출판, 장편만화영화의 제작과 상영, 최근의 ‘만화학회’의 결성 등으로 절정에 달한 ‘만화 열기’를 앞서 읽어내고 책 안에 오롯이 담아냈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1975년에 시작하여 1990년에 한 차례 변화를 꾀했던 ‘열화당 미술문고’는 2000년에 출간된 『변시지』와 『모딜리아니』를 끝으로 사반세기에 걸쳐 제 역할을 톡톡히 다하고 이제 그 화려했던 시대를 마감하고 있다. 새롭게 변화되는 현실 속에서, 예술의 영역과 그 내용이 끊임없이 확대되어 가는 문화환경 속에서, 열화당은 지난 세기의 ‘열화당 미술문고’와 같은 또 다른 이 시대 미술출판의 전형을 창출할 모색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2. 시대를 담아낸 사진집, 『우연 또는 필연』

예술에 포함되는 장르가 회화 등 전통적인 것들에서 벗어나 사진, 영화 등 그 동안 상대적으로 변방에 위치해 온 장르들을 포함시키는 과정은 예술의 진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것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비상한 관심을 고려할 때 이제 그 동안 홀시해 온 장르에 대한 관심은 어느 영역에서나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거기에 발맞추어 사진 등을 예술의 범주에서 취급한 책들이 부쩍 부상하고 있다. 열화당에서는 이미 1983년에 시작해 1993년에 마무리된 20권의 ‘한국의 굿’ 시리즈를 펴낸 바 있고, 또 1987년에 출판된 사진집 『경주 남산』을 비롯하여, 골목 안 풍경을 꼼꼼하게 담아낸 김기찬의 사진집들, 사진문고의 한 부분으로 출판된 정범태와 최민식의 사진집, 그리고 나무를 소재로 작업을 한 한정식의 사진집 등 여러 권의 사진집을 펴냈고, 또 1988년부터는 ‘밝은 방’이라는 제목을 단 사진학회 카메라 루시다의 회원지까지 출판했다. 여기에 미술선서에 포함된 『사진예술개론』 『세계사진가론』 『사진의 역사』, 또 『사진의 제국』 등을 합하면 사진예술에 관한 한 이론과 실제 모두에서 적잖은 축적을 쌓아 왔다고 할 수 있다.
1994년에 출판된 강운구의 『우연 또는 필연』은 그런 사진 관련 출판에서 하나의 굵은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994년 6월 17일부터 28일 사이에 학고재 화랑에서 열린 「강운구 사진전」과 함께 이루어져 대단한 화제를 뿌렸는데, 그것은 사진전에 대한 강운구의 곱잖은 시선—사진전이 사진작가의 자화자찬식 행사로 전락했다는—과, 또 출판을 통한 독자와의 접촉을 선호하는 그의 사진 전시 방식에서 비롯한다. 또한 그의 사진집은 몇 가지 출판미학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 책은 사십대에 이른 한 예술가가 자기 시대에 던지는 정직한 발언이자, 폭력과 파괴에 대한 사진적 저항이라는, 철학이 담긴 사진집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작가의 발언과, 그의 작업을 쭉 지켜 본 소설가 조세희의 입을 빌려 그의 사진들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점검해 보자. 강운구가 진단한,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이렇다.

“지난 역사를 보아도 이삼십대에 인간의 진짜 척추라 믿고 애써 간직하려고 했던 가치나 사회도덕적 규범들, 그리고 개개인의 마음속 소유인 아름다운 정신을 사십대 마흔 몇 살이 되자 밖으로 던져 버려 ‘죽음’을 맞게 하는 일은 너무 흔했다.”

이것은 나이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사람을 그런 식으로 타락시킨 시대 상황에 대한 은유이다.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하기 힘든 시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그것을 가질 수 없게 하는 시대란 어쩌면 뒤로 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 어두운 시간들에 맞서 온전한 시간의 자취를 카메라에 담아 기록하고 또 증거하려 한 작가는 여기에 덧붙여 사진 기록이 절박해진 현실적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전통사회가 처참하게 파괴되어 왔다. 도시와는 달리 시골은 그 혜택도 전혀 받지 못했다. 새마을운동이 망가뜨리기 시작한 시골이 더 망가지기 전에 기록하자는 뜻에서 이 작업을 해왔다.”

아마 이러한 위기감은 사진작가 김수남이 전국의 굿판을 돌며 갖게 된 그것과 마찬가지 이유였으리라. 물론 강운구의 카메라가 포착한 피사체들은 일반명사로서의 시골 또는 시골사람들이라기보다는 가장 심하게 훼손된 대상, 혹은 아름다운 인간의 얼굴이 깃들어 있는 흔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땅 모든 영혼의 심장에 간다”라는 조세희의 글은 사진작가 강운구의 작업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가 카메라에 담아낸 ‘일하기 싫은 소’를 비롯한 수분리 사진들은 아름다움과 애절한 사연들에 대한 기막힌 압축이라 할 수 있으며, 건새집 마을, ‘용대리 조씨’ 연작이나 연탄배달부를 담아낸 넉 장의 시퀀스 사진들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서 사람이 사는 상황과 조건들, 그리고 그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바람이 잘 형상화된 것들이다. 이러한 강운구의 작업은 조세희에 의해서 이렇게 묘사된다.

“진정한 사진작가는 표현욕구를 자극해 사랑을 퍼부을 수 있는 것에만 무섭게 사로잡힐 수 있다. 강운구는 우리 잔인하고 음험한 시대가 파괴하려는 것에, 이미 파괴되고 남은 상처에, 그리고 그가 카메라에 필름을 넣어들고 혼탁한 도시를 나서는 순간부터, 아직도 우리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고 속삭이며 다가오는 아름다운 것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사진을 찍으러 가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진실과, 자기가 뜨겁게 사랑하는 것들, 자신을 키워 준 사람들, 그들의 생활, 노동,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들어 있는 영혼에 가는 길이었다.”

‘우연 또는 필연’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우연한 순간들이 작가의 눈에 포착되어 필연으로 바뀌는 각 사진들은 독립적이면서 하나의 가닥 안에 꿰어진 조화로운 낱낱처럼 구성되어, 하나의 이야기—파괴에 대한 아름다운 영혼의 저항—를 들려 준다.
이 책은 사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사진적인 것의 의미에 비판적 성찰을 제공하며, 또 사진의 질감과 깊이를 그대로 전하려 흑백사진임에도 3도 분해를 사용해, 사진에 대한 출판미학의 면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로 기록되고 있다. 작가 강운구는, 지나간 시대는 흔적 없이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 선명하게 영속한다는 점을, 사진을 기록한 책을 통해 은유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3. 영상매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길잡이, ‘영상원총서’

80년대까지 지배적인 예술 조류 혹은 경향이 회화를 중심으로 한 전통예술이었다면 90년대 들어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그 흐름에 다양한 새로운 경향들이 가세하고 또 서로 세력다툼을 벌이면서 대중들을 포섭하는 과정에 있다는 점이다. 그 중 특히 영화를 중심으로 한 영상매체의 발전은 눈부신 것이었는데, 그것은 관객들의 다양한 반응들을 흡수하면서 스스로를 확대 재생산해 왔다. 그렇지만 그러한 발전에 발맞추어 그것을 깊이있게 해석하고 분석하는 안내자는 거의 없었다. 그 역할을 담당할 제대로 된 학술적이고 이론적인 접근이 긴요해졌다. 그렇지만 우리 현실은 아직 거기에 있지 못하다. 영상원장 최민은 이런 현실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정보화시대에 우리 사회도 진입했다고 하지만 영상 분야의 지식이나 정보에 있어서는 아직 후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갖가지 영상 또는 이미지는 도처에 풍부하게 넘쳐나 우리의 감각을 현란케 하고 있는데 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도움을 줄 말이나 글은 빈곤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그것은 미래의 영상세대를 책임지는 영상원이 해야 할 바이며, 동시에 그것의 구체적 표현인 출판물이 가야 할 바이다. 그런 합의에 도달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과 열화당은 그 계획을 구체화하는 문제를 두고 많은 논의를 가졌다. 영상원총서가 어디까지 아우를 것인가 하는 범위의 문제, 전체 계획과 그 속에서 우선 순위를 정하는 속도의 문제, 크고 작은 실무적인 문제 등. 그리고 그 결과 우선 『영화에서의 몽타주 이론』 『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이라는 두 권의 성과물을 내놓게 되고, 뒤이어 『할리우드 만화영화』를 출간한다. 세 권 모두 영화와 만화영화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총체적인 안목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세 권의 책을 출간한 후 영상원 쪽의 호응과 열의 부족 등으로 더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게 되었고, 영상예술에 관한 좀더 계획적인 출판을 미래의 과제로 남기게 되었다.

4. 옛것이 살아 숨쉬는 사람・자연・역사의 공간 『書院』

믿기지 않을 정도의 산업발전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문화유산을 개발의 장애요소로만 보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최근에 들어서야 전통문화의 특수성이 새로운 자산이 되는 세상이 되었음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문화재와 유적지가 이미 아스팔트 밑에 묻히거나 쓰레기장으로 만들어져 이를 복원할 가능성은 없어졌다. 따라서 남은 것이나마 지키고, 복원 가능성이 희미해진 문화재의 진정한 가치나마 되살려내는 일이 급하게 되었다.
현재의 우리가 옛것은 죽어가고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는 위기에 봉착해 있다면, 『서원』은 옛것을 통해 미래에 구축해야 할 정신세계와 인간환경의 방향을 암시해 주고 있다. 출판평론가 이중한은 이 책의 출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한다.

“이 책에서 서원은 완전히 새롭게 탄생한다. 글로 쓰인 성리학의 역사와, 의리와 탐욕의 갈등에서 외로움을 추구한 그 여러 선비의 기상과 덕행 등도 적절히 담겨 있기는 하지만, 이보다는 사진작가와 건축학자의 눈으로 뜻밖의 조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서원』은 마치 문화유산에 대한 하나의 이벤트처럼 느껴진다. (…) 산 좋고 물 맑은 그윽한 곳에서 수양하고 책 읽으며 마음의 정결한 공간을 넓히려 했던 선비들의 정신은 지금 이 변화의 시대에 매우 의미 있는 한국의 문화 이미지로 키워 알려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전통건축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사진으로 기록하고자 오랜 동안 애써 온 사진작가 안장헌과, 전통 건축공간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탐구하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갖춘 학자 이상해가 만나 그 결실을 이루었다.
5년여의 준비기간 동안 전국의 서원을 찾아 돌아다녔으며 그 중 예순네 곳의 서원을 선정하여 이 책에 담아냈다. 각 서원의 연혁・奉享人物・건축공간 등을 아우르는 글과 상세한 배치도를 바탕으로 하여, 550여 컷에 달하는 컬러사진으로 그 모습이 풍부하게 나타난다.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구현된 서원건축의 절제된 조형미와 그 정신세계를 사진언어로써 형상화한 이러한 사진작품들은 각 서원의 환경과 성격에 따라 알맞은 계절과 시간에 촬영되었으며, 이는 수차례의 답사 결과 이루어졌다. 이 기간 동안 만난 상당수의 서원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 공간에 담긴 정신의 자취만을 전할 뿐, 그곳에서 과거의 온전한 모습을 기대하기란 힘들었다. 이렇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이내 사라져 가는 서원에 서린 유무형의 흔적을 이 책은 담고 있다.
서원을 건립한 근본바탕은 절제와 맑음을 핵으로 하는 조선조 사대부들의 성리학적 정신으로, 말기의 폐해였던 허례허식과는 구별된다. 서원이야말로 향촌을 교화하고 향촌에 바탕을 둔 공동체적 삶의 모델을 제시한 곳으로, 사람과 자연, 그리고 건축이 하나가 되는 인문환경과 문화경관을 조성했다.
지금에 와서 서원을 새롭게 조명하는 이유 중 하나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세계와 삶의 자리의 중심으로 들어가 살아 숨쉬는 사람과 건물, 그리고 자연이 조화하는 요체를 꺼내고자 함이다.

5. 만화로 부활한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행복한 고전이란 많은 독자들이 오랫동안 읽고 또 늘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어떤 책은 명성에 비해 극히 적은 독자만을 가지고 있다.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지만 그 내용의 난해함과 그에 따른 믿을 만한 번역서의 부재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고 할 수 있다. 난해한 문장들,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끝없이 중첩되고 혼재되어 있는 이 소설은 일반 독자만이 아니라 연구자들도 제대로 읽어내기 힘든 작품으로 유명하다. 숱한 국내 독자들도 이 책을 읽으려 애를 쓰지만 중도에 그만둔 경험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 대작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그런 시도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만화를 통해 프루스트의 대작을 부활시킨 일이다. 그 주인공은 광고계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프루스트의 작품세계에 매료되어 만화가의 길로 뛰어든 영상 전문가 스테판 외에다. 그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작품 전체를 열네 번이나 정독했고, 이야기체 감각을 보여 줄 문장들을 점차적으로 골라냈다. 또 사진자료를 수집하고, 프루스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파리 외곽의 일리에(콩브레) 지역의 풍경과 건축물을 스케치했으며, 그 시대의 의상을 연구하고, 프루스트의 특이한 삶을 보여 주는 여러 곳을 방문하는 등 2년간 이 작업을 위해 준비했다. 이렇게 해서 만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1년에 한 권씩 12년에 걸친 작업계획을 가지고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이 책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경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 문학사적 성가에 비해 소수 전공자를 제외한 일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 일곱 권에 달하는 이 대하적 장편의 완역이 이루어진 것도 극히 최근의 일이려니와, 비교적 일찍부터 국내 독서계에 소개되어 온 이 작품의 일부(이 대작의 1권인 「스완네 집 쪽으로」가 널리 알려져 있다)조차 원작의 섬세한 호흡과 작가의 구도자적 결벽을 우리말의 섬세한 호흡으로 치환하는 데 미진함이 많았다. 한데, 과연 프루스트 작품의 만화화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아주 버릴 수는 없지만, 모두 열두 권으로 완성될 예정인 이 작업을 일 년에 한 권씩 신중히 진행한다는 점이 우선 미덥고, 그 첫 권인 이 책에서 확인되듯 작중의 배경이 되는 지역과 풍속에 대한 충분한 답사와 고증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번역자가 프루스트 전공자라는 점도 신뢰를 더한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1권이 출간된 지 3주 만에 초판 12,000부가 모두 팔려나가 8,000부를 다시 찍었다고 한다. 이 만화책에 대한 현지 반응은 긍정론과 부정론이 뒤섞여 있다. 그렇지만 프루스트의 원의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작업된 이 책이 프랑스 독자들에게 유익한 프루스트 문학 체험이 되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며, 이것은 다른 언어권에 속해 있는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훨씬 실감나는 프루스트 체험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프루스트의 문학세계를 애정이 깃든 그림들로 복원해낸 이 만화가의 화필에 매혹되지 않을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프루스트의 작품을 문자 텍스트로만 접해 왔던 독자들은 이 만화본의 어떤 대목에서는 원작을 통해선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엄청난 속도감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단선적 서술의 전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문학 독서행위와는 달리, 몽타주를 서술의 기본단위로 삼는 만화는 원전의 문자 텍스트를 영상 이미지에 함께 담아 한눈에 보여 주는 마력을 발휘한다. 이는 만화만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한편, 문학평론가 김화영은 이 만화 시리즈의 장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프루스트에 웬 만화? 하고 고개를 돌렸던 나를 완전히 설복시킨 만화예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방대하고 복잡 난해한 구조 앞에서 접근할 엄두를 못 내는 독자에게는 친근 소박한 입문의 기회. 숨막히도록 이어지는 서술의 미로를 따라 마침내 이 거대한 박명의 성채를 답사하고 나온 고급독자에게는 그 활홀하나 어느새 아득해진 세계를 줌 렌즈로 확 당겨 간명하게 정리해 주는 투명한 거울. 깊이있는 이해와 해석만이 개성적인 각색으로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음을 증명한 만화가와 각색자, 그리고 전문가의 눈으로 섬세하고 명쾌하게 텍스트를 해석하여 옮겨 준 번역자에게 경의를.”
또한 원로 불문학자 홍승오는 각색자 스테판 외에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섬세한 심리묘사, 세밀한 사회묘사, 대담한 풍속묘사, 깊이있는 예술론, 끊길 줄 모르는 긴 문장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방대한 구조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최소한의 줄기만 지문 형태로 발라내고 나머지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바꾼 만화가 외에의 노력은, 이전의 스크린 플레이나 영화 등 다른 분야에서의 시도와는 달리 성공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결코 이 책이 프루스트의 원작을 읽는 독서행위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는 싶었지만 어려워서 포기했던 독자들에게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는 가능성, 프루스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충실한 통로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편, 한 권 한 권이 나오면서 만화가이자 각색자인 스테판 외에는 각색과 그림 작업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작업 기간이 점점 길어져 애초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며, 현재 다섯번째 권까지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