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화당이 걸어온 길

5. 종이책의 새로운 전형을 모색하는 시기 2000-2008

새천년에 들어서면서 출판계는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인터넷의 급속한 확대와 전자책(e-book)의 등장으로 제기된 종이책의 입지 약화, 온라인 서점의 등장에 따른 도서정가제 논쟁, 중소형 서점의 폐업 등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당초 언론매체들에서 우려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새로운 매체들이 속속 등장해 하루가 다르게 그 힘을 확장해 나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종이책의 위기가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이런 사이버 매체들의 급속한 성장 속에서 열화당은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한편, 종이책의 존엄성을 지키는 대열에 앞장서고자 한다. 읽고 만지고 느끼면서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종이책 고유의 장점을 활자와 이미지로써 극대화시킬 것이며, ‘우리 문화예술론의 선구자들’과 같은 기획물은 그 구체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1989년, 영세한 출판문화사업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으로 뜻있는 출판문화인들에 의해 발족된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는 이후 근 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2001년 6월 역사적인 착공식을 갖고, 2002년 6월 시범지구가 입주하게 됨으로써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출판문화도시, 책을 중심으로 한 각종 문화 인프라가 집중된 ‘북 유토피아’의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출판사상 어느 누구도 꿈꾸지 못했던 총면적 481,000평에 이르는 대단위 사업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21세기 지식 정보화 시대를 선도하고 우리 출판문화를 주도해 나갈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는 기존의 출판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것이었는데, 기존의 방식에 젖어 있던 우리 사회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간 겪어 온 정부와 수많은 관련자들의 몰이해와 비협조로 적잖은 회의와 좌절감을 느낄 때마다 파주출판단지 이사장인 본사의 발행인은 안중근 의사의 삶과 정신을 되새기며 의지를 다지게 되었고,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그간 마음속으로만 경외해 오던 안 의사의 책을 출간하게 된다. 안 의사의 ‘검찰관 신문조서’와 ‘공판시말서’를 옮겨 엮은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을 통해 발행인은 우리 시대 젊은이들에게 안 의사의 삶과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자 했으며, 이후 파주출판단지 인포룸에서는 출판기념회를 겸한 ‘안중근 스승 순국 90주기를 추도하며, 그분을 출판도시에 모시는 모임’을 갖기도 했다.
한편, 2004년 2월 열화당은 파주출판도시 신사옥으로 이주하여 이른바 ‘파주 시대’를 열어 나가게 되었다. 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 대학의 세계적인 건축가 플로리언 베이겔 교수가 설계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김종규 교수가 협력하여 완공한 열화당 사옥은 ‘단단함 속에 스며든 부드러움’이라는 개념으로 지어졌는데, 플로리언 베이겔은 이 건물의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열화당은 동서양의 다양한 미술과 한국 전통문화에 관한 책을 장인정신으로 만들어내는 출판사이다. 우리는 이 책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건물을 디자인하는 데 어떤 높은 기준을 세우도록 하는 충분한 동기가 부여되었다. 열화당 건물의 형상과 색은, 우리가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본, 햇빛을 가리기 위해 프레임 위로 검은 비닐망을 덮은 구조물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현무암 돌담에서 영감을 얻었다. 한국적 개념 속의 비움(空, emptiness)과 검정색, 그리고 출판도시의 중심개념인 ‘랜드스케이프 안에서 도시 그리기’를 생각하면서, 마침내 검은 직육면체를 조각칼로 깎아내듯 건물 형태를 만드는 방법을 떠올렸다. 즉 건물 가장 바깥면은 검은색으로 남아 있고, 도려낸 부분은 마치 속살이 드러나듯 투명한 면이 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깎이고 남은 빈 공간은 투명한 벽으로 둘러싸인 마당이 되었다. 양 모퉁이가 크게 잘려 나간 3, 4층은 저층부에 올라앉은 파빌리온으로서, 이 양면은 모두 투명하게 된다. 이처럼 마치 엄청난 크기의 추상문자 조각 하나가 지평선 위에 세워져 있는 듯한 열화당 건물은, 검정색의 단단함 속으로 투명한 부드러움이 걸어 들어오는 느낌을 지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취한 건축적 전략(sculpture strategy)이며, 열화당 건물의 형태적 가치(iconic quality)이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과 그에 요구되는 변화된 모습을 갖춘 열화당은, 잘 짜여진 넓은 공간과 쾌적한 환경 속에서 보다 여유있고 활달한 책 만들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파주 신사옥에 입주하던 해 10월, 사옥 1층에 열화당의 책과 미술 관련 외서를 전시 판매하는 아트북 카페 ‘향기있는 책방’을 마련하고, 열화당 책의 출간과 함께 자그마한 전시를 할 수 있는 ‘갤러리 로터스’를 오픈한 것도, 열화당 출판환경의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한편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되면서 한국의 출판역량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형성되었는데, 열화당의 경우 그 동안 한국전통문화 분야에서 쌓아 온 성과물들이 비로소 제 빛을 발하게 된다. 도서전을 대비하여 프랑크푸르트 주빈국 조직위원회 산하 한국문학번역원에서는 ‘한국의 책 100’ 번역출간사업을 진행했는데, 여기에 ‘한국의 굿’ 시리즈(전20권), 『우리 옷과 장신구』 『한글의 역사와 미래』 『한국 선시』 『한국 가면극, 그 역사와 원리』 『圓融과 調和』 『단원 김홍도』(이상 영어), 『한국미의 조명』(독일어), 『한국의 고궁』(불어) 등 열화당의 책 아홉 권이 선정되었다. 그 동안 우리 문화를 잘 기록하고 출판해 온 열화당의 결실이 드러난 셈이다. 이 중 ‘한국의 굿’ 시리즈, 『한국 가면극, 그 역사와 원리』는 열화당에서 직접 편집, 제작, 출간했고, 나머지 책들은 외국 출판사들과 저작권 계약을 맺어 출간되었다. 특히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는 20권의 ‘한국의 굿’ 시리즈를 1권으로 압축 편집한 『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를 집중적으로 홍보했는데, 도서전에 참가한 여러 나라의 출판사들로부터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는 세계 속 한국의 입지가 점점 넓어지고, 위상이 높아질수록 우리 문화를 제대로 기록해 온 열화당의 역할과 위상 역시 비례함을 시사해 주는 계기였다고 하겠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책으로는 미술사학자 강우방의 『法空과 莊嚴』, 송혜진・강운구의 『한국 악기』, 이화여대 이경자・홍나영・장숙환 교수의 『우리 옷과 장신구』, 최초의 한국미술 통사로 알려진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 『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 그리고 새로운 시리즈로 열화당 미술선서를 잇는 ‘열화당미술책방’, 잊혀져 가는 선학의 글을 통해 우리 본연의 문화예술을 되새기고자 기획된 ‘우리 문화예술론의 선구자들’, 새로운 ‘열화당 사진문고’ 출발, 영국 테이트 미술관과 공동으로 출간한 ‘현대미술운동총서’, 영국의 미술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의 작품들, 1800년부터 1961년까지의 우리 미술의 역사를 낱낱이 밝힌 역작 ‘한국근현대미술의 역사’(전2권), 끈질긴 연구와 연극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신선희의 『한국 고대극장의 역사』, 30년 전후의 한 마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여 주는 다큐멘터리 사진집 『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 20세기 최고의 사진가라 불리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집 『내면의 침묵』과 사진에세이집 『영혼의 시선』, 한량무의 명인 조흥동의 사진무보집 『趙興東의 閑良舞』, 루브르박물관과 만화전문 출판사인 퓌튀로폴리스의 기획으로 번역출판되기 시작한 ‘루브르 만화 컬렉션’, 남도의 화가 강연균의 그림인생 45주년을 맞아 출판한 『강연균 작품집』, 한국영화자료 수집가 양해남이 수집한 한국영화포스터 2,000여 점을 담은 『포스터로 읽는 우리 영화 삼십 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모든 업적을 보여 주는 ‘우현 고유섭 전집’의 출발, 건축학자 손세관의 ‘주거로 읽는 역사도시의 기억’ 시리즈의 시작, ‘새로운 조형’을 향한 몬드리안의 끈질긴 실험과 탐구를 엿볼 수 있는 『몬드리안의 방』 등이 있다. 한편 출판사의 발행인은 2001년 사진집 『세상의 어린이들』과 문집 『출판도시를 향한 책의 여정』(눈빛)을, 그리고 2007년에 『의리를 지킨 소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1. 한국 고대미술사 연구의 역작 『法空과 莊嚴』

1991년에 출간된 한국 불교미술사의 역저 『圓融과 調和』 이후 10년간의 연구를 담은 저자의 제2 논문집으로, 『圓融과 調和』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고대조각에 관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法空과 莊嚴』은 조각을 중심으로 회화・공예・건축 등 예술의 전 분야로 그 영역을 확대했다.
‘法空’과 ‘莊嚴’은 각각 ‘진리’와 ‘예술’을 뜻하는 불교용어로서, 종교가 진리를 지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도 수단에 머물지 않고 진리를 실현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담긴 논문들은 종교와 예술은 방법은 다르지만 진리를 구현하려는 점에서 뗄 수 없는 한 몸을 이룬다는 관점에서 씌어졌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권영필 교수는 前作 『圓融과 調和』와 더불어 이 책을 이렇게 평가했다.

“두 권의 저서는 모두 서론 부분에 조각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한국예술론 일반에 관해 깊은 통찰과 분석을 가함으로써 자기의 고유한 미학을 완성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성과는 고대 조각작품들(주로 불상)을 철두철미 사상과 연결지어서 연구하는 저자의 탁월한 방법론에 의해 구현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석굴암론과 화엄미술론은 압권이다. 현하 모든 사조가 서양식 일변도로 되어 가는 문화현상 속에서 ‘내 것’을 보석 찾아내듯 탐구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의 교정과 편집에만 꼬박 두 해의 시간이 소요될 정도로 방대한 이 책은, 한국미술품들을 미시적으로 분석하고 거시적으로 파악하여 한국미술사의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사의 맥락에서 살핀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문제를 던지고 반드시 여러 측면에서 증명하려는 실증적 태도를 취했다.

2. 시대의 흐름과 경향을 충실히 담아낸 미술총서의 전형 ‘열화당 미술책방’

지나온 40년을 반추해 보았을 때 열화당의 얼굴이란 무엇일까. 당장 떠오르는 낱낱의 책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지난 세월 힘이 되어 주고 열화당을 현재의 자리에까지 이끌어 준 제일의 공로는 미술선서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미술선서는 1977년 출간되어 서양미술에 대한 본격적인 장을 마련한 『서양미술사』(미술선서 1, 2)로부터 1998년 출간된 『단원 김홍도』(미술선서 70)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간 동서양 미술의 고전과 다양한 이론・경향 등을 쉼없이 소개해 왔다. 좋은 미술책이 드문 당시의 실정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미술선서는 자그마한 숲의 모습으로 기억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나무 그늘 아래에서 생명의 체취를 느끼며, 간혹 바람 속에 묻어 나오는 여유로움을 즐기기도 하며, 세월의 열매를 따먹으며 그렇게 자신과 숲이 함께 커 나간 것이라면….
그러나, 시대의 변화, 더 일차적으로는 출판물 제작 및 독서구조, 그리고 정보 유통방식의 급격한 변동 등에 발맞추어, 미술선서는 열화당 미술책방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운 세기에 조그만 숲을 또 하나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열화당 미술책방’은 미술선서의 뒤를 이어 새로운 시각매체를 폭넓게 수용하면서 그 이론적 실제적 구명과 동시에, 전통의 위엄과 가치를 올곧게 지켜내고 기록하는 지킴이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시대의 흐름과 경향을 충실히 담아낸 책들로 이 시리즈를 빼곡히 채우고자 하며, 이들은 내용과 이미지 모두에서 고밀화, 고농축되어, 아름다운 책이 지닌 위력과 감동을 한껏 발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시리즈는, 인쇄매체의 입지가 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가는 현실에서, 앞으로 활자매체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내용과 이미지의 전형을 창조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그를 통해 책이 지닌 힘과 감동을 한껏 발휘할 것이다.
1차로 미술선서라는 이름 아래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 왔던 책들 가운데, 지금도 유용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건축예찬』 『점・선・면』 『사진예술개론』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 『인상주의』 『도시주거 형성의 역사』 『미술비평의 역사』 『문화재 다루기』 『한국미술사 방법론』 등 아홉 권으로 첫걸음을 내디뎠으며, 20세기 유럽 현대예술의 새로운 탄생을 선포했던, 칸딘스키와 마르크가 펴낸 『청기사』, 영국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인 빌 리제베로가 정치경제학적 시각으로 근대 시기의 건축사를 서술한 『건축의 사회사』 등 현재까지 26종이 출간되었다.
앞으로는 새로운 시각매체들도 폭넓게 수용하면서 그것의 의미와 방향을 짚어 나가야 할 것이며, 동시에 전통의 위엄과 가치를 올곧게 지켜내고 또 기록하는 역할까지 담당해야 할 것이다.

3. 先學들의 인문정신을 오늘에 되살린 ‘우리 문화예술론의 선구자들’

오늘날 우리는 텔레비전, 인터넷 등의 매체가 갖는 속도감이나 피상적인 화려함에 길들여져 혼란스럽고 황폐해진 언어 사용을 하고 있으며, 문화에 대한 식견과 안목 그리고 학문 방법 또한 부박해져 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를 아래의 발간사로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 문화예술론의 선구자들은 우리 문화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준거를 마련했던 선학들의 학문적 성과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사료적 가치를 온전히 오늘에 되살리고, 그 속에 깃들인, 제대로 사고하고 제대로 쓸 줄 알았으며 바르게 학문했던 인문정신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학문적・문화적 師表로 삼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무런 여과 없이 횡행하는 수많은 매체에 길들여져 난삽한 글쓰기와 글읽기를 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 문화전통의 실질적 토대가 되는 언어의 구사와 표현 그리고 학문탐구의 방법은 날로 부박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문화전통이 극도로 혼란한 때에, 선학의 글을 읽고 배우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풍요로운 일일 뿐만 아니라, 간결 담백 호방한 우리 언어의 참맛과 풍부한 교양 그리고 격조 높은 인문정신을 체득하게 해줄 것이며, 날로 저급해지고 비속해져 가는 우리의 말과 글을 일깨워 바로잡는 매서운 죽비가 될 것입니다.”

이문재 시인은 다음과 같이 이 시리즈를 평한다.

“금박에다 양장본. 이른바 호화 장정이다. 하지만 호화 장정이 아깝거나 넘치지 않는다. 표지뿐만 아니라 본문 편집까지 품격이 있다. 저자를 닮은 책이다. 책을 닮는 저자도 있지만 이 경우는 책이나 저자 모두 불우할 때가 많다. 사후에도 자신의 저서를 장악하고 있는 저자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책 속에서,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저자, 그 저자가 고전의 저자이다.”

시리즈의 첫 인물로 미술사학자 近園 金瑢俊을 선정했고, 그의 글 대부분을 모아 ‘근원 김용준 전집’을 다섯 권으로 출간했다. 전집은, 1948년 발행되었던 한국 수필문학의 精髓라 일컬어지는 제1권 『새 근원수필』, 1949년 초판 출간 당시 한국미술사의 교과서라 불렸던 제2권 『조선미술대요』, 조선회화에 관한 글을 모은 제3권 『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 1958년 북에서 출간된 것을 새로이 편집・복간한 제4권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그리고 그 밖의 미술론・미술비평・산문들을 모은 제5권 『민족미술론』으로 이루어진다.
『새 근원수필』과 『조선미술대요』의 출간 이후 서울대 미대 김병종 교수는 세 번의 서평을 쓰게 되었는데, 이를 인연으로 『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의 해제를 쓰게 됨으로써 열화당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이 시리즈의 출간 의미를 들어 본다.

“오늘날과 같이 전통적 미의식이 붕괴되고 국적 불멸의 괴상망측한 조형행위들이 ‘현대’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창궐하는 현실에서 선생의 존재는 더욱 아쉽기만 하다. 우리 문화계 전반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미술계에서도 어른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꾸짖고 나무라며 일갈할 그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날로 아쉽기에 그분의 목소리가 더욱 그리운 것이다. 오늘도 그 책들을 들추면서 나는 뵌 적도 없는 선생의 육성을 듣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근원 김용준 전집’은 시대를 넘어 읽히고 또 읽혀야 할 우리 미술의 고전인 것이다.”

한편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근원 김용준 전집’의 출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누군가 했어도 벌써 했어야만 했던 일이다. 근원 김용준 전집 5권은 한 사람의 화가, 미술평론가, 미술사가 그리고 당대의 문장가로서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자취이자, 불행했던 민족사의 아픔과 그 아픔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서려 있는 한 지성의 증언이다.”

전집 다섯 권 중 비교적 알려져 있던 것이 『근원수필』과 『조선미술대요』인데, 시인 김용택은 이 두 권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수필은 정월대보름 찰밥처럼 묵직하고 찰졌다. 그 맛은 마치 별 양념 없이 담아 땅에 꼭꼭 묻어 두었다가 봄에 꺼내 먹는 김치의 맛이었다. 우리 어머님은 그런 봄 김치의 맛을 ‘게미’가 있다고 했는데, 그의 글은 읽을수록 글 맛이 그렇게 진득하게 우러났던 것이다. 글을 읽고 있으면 그 속에 담긴 그의 마음이 내 몸과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금방 내 살이 되고 따뜻한 내 피가 되어 내 말이 되어주었다. …이 책(조선미술대요)은 미술사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기술한 책이지만, 글쓴이가 고구려의 벽화 이야기를 할 때면 마치 내 살이 꿈틀거리는 것 같아 힘이 절로 솟아나고, 백제나 신라의 예술품들을 이야기할 때는 예술품들을 다듬고 있는 그때 그 사람들의 모습이 내 곁에 있는 것처럼 글쓴이의 감정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근원 김용준 전집’의 가치는 무엇보다 월북 이후 남과 북에 흩어져 있던 우리 미술사의 寶庫를 ‘김용준’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어 보여 주는 데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은 단순한 복간에 머물지 않는다.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은 물론이거니와 편집 과정상의 노력 또한 수월치 않았다. 그 예로 『새 근원수필』 같은 경우, 비록 ‘수필’이긴 하지만 50년 후를 사는 지금 세대에게는 낯선 표현이 있음을 고려해 ‘이 책을 읽는 사전’식의 풀이를 필요한 페이지마다 달았고, 인용된 한문 구절이나 한시는 번역해 작은 활자로 본문에 병기했다. 또한 근원이 남긴 그림과 삽화, 참고 사진과 작품을 적절히 배치해 시각적인 이해를 도왔다. 인명・작품명・지명・회화용어 등의 일반적인 찾아보기뿐만 아니라, 별도로 편자주를 단 것 중 어려운 한자어・일본어 등의 항목을 따로 모은 ‘어휘풀이 찾아보기’를 두어, 근원이 살던 시대에 쓰이던 말들을 한눈에 살피도록 했다. 이러한 편집상의 기본원칙은 ‘우리 문화예술론의 선구자’들 전체에 해당한다.
이 외에도 한국 근대기의 대표적 사학자인 湖岩 文一平의 예술 관련 글을 모은 『예술의 성직』과,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이며 미술사학자인 凡以 尹喜淳의 『조선미술사 연구』가 출간되었다. 격조와 대중성을 함께 아우르는 문일평의 글은 오늘날 읽어도 그 내용의 선구성과 수려한 문장에 감동을 받곤 하며, 탁월한 史眼과 민족예술에 대한 애정어린 숨결을 가깝게 느낄 수 있다. 한편 윤희순의 책은 민족 전통의 계승과 그 현대적 혁신의 길을 명확히 제시한 미술론으로, 우리 미술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역사의식과 통찰이 온축된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리즈의 출간 이후 언론사와 독자들의 문의・격려 전화 등 적지 않은 반응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이 시리즈를 준비하는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김용준의 유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직접 만나 보고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과 회화작품 등을 제공받았고, 제5권 『민족미술론』의 부록으로 김용준의 모든 회화작품과 도서장정, 개인 자료 등을 선보이게 되었다. ‘근원 김용준 전집’은 2002년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전집 부문을 수상했다.
전집 다섯 권을 발간하고 5년의 세월이 흐른 2007년, 새로 발굴된 근원의 수필 9편, 산문 4편, 동양화 작품 1점, 도서장정 15점, 삽화 10점, 사진 10점, 그리고 근원 김용준의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 시절의 제자 서세옥 화백의 회고와 수정 증보한 연보, 저작목록 등을 한데 묶어 전집의 보유판으로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을 펴냈다.
『새 근원수필』을 선보일 때 『근원수필』에 수록되지 못한 근원의 수필 23편을 새로 발굴하여 선보임으로써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었는데, 이번에 새로 발굴한 수필 9편 역시 ‘수필’이란 어떤 글인지를 보여 주는, 담박하고 감칠맛나는 보석과도 같은 명문들이다. 한편, 그는 뛰어난 도서장정가로도 알려져 있었는데, 기존의 전집에 실리지 못했던 장정 작품 15점과 삽화 10점이 이 책에 새로 소개되었다. 각각의 책의 성격에 맞게 고졸하고 운치있는 그림과 글씨로 꾸민 표지들을 통해 김용준이 당대의 뛰어난 북디자이너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한 권의 책으로 만나는 국악박물관 『韓國 樂器』

국악기는 국악을 연주하는 도구이자 동시에 한국인이 자신들의 마음을 소리로 표현한 문화 매체이자 상징이며, 고유한 심미의식의 결정체이다. 그러므로 국악기에 대한 이해는 국악 전반을 이해하는 기초이자 국악의 특질, 나아가 한국문화의 특질을 파악하는 열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이나 서점의 서가에서 국악기를 체계적으로 소개한 책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음악을 세계에 소개할 완성도 높은 국악 안내서를 찾기 어렵다는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점을 깊이 인식한 발행인은 전 국립국악원장 한명희 교수와 함께 『한국 악기』의 출간을 발안했고, 당시 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으로 재직 중이던 송혜진이 글을 쓰고 사진작가 강운구가 사진을 찍음으로써 그 계획은 구체화되었다. 우리 시대의 『樂學軌範』이 될 책을 만들자는 초심에서 출발한 지 2년여, 마침내 악기의 문화를 통해 한국음악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글과 사진을 모아 정성껏 편집하여, 전문적・학술적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면서도 교양인이 흥미있게 읽으며 국악기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 국내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 없을 국악 안내서가 되도록 꾸며, 열화당 창립 30주년 기념도서로 출간되었고, 2001년 한국백상출판문화상 기획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양대 국악과의 권오성 교수는 이 책의 진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악기의 본질적인 측면은 물론이거니와 악기와 관련된 여러 시대, 여러 계층의 악기 이야기, 고고학 자료에 나타난 악기, 조선후기 회화에 나타난 국악기 등을 재미나게 소개하였기 때문에 자칫 따분한 먼 곳의 얘기처럼 들려지는 것을 방지하고 읽는 재미를 솔솔 느끼게 해주고 있다. 이러한 국악기의 문화적 미학적 음악적 측면과 더불어 악기학적인 측면을 위해 악기의 제작과정을 상세하게 곁들인 점과 국내외 소장 주요 국악기를 조사함으로써 이 책의 진가를 더욱 올리고 있다.”

『한국 악기』는 ‘총설’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부록’의 다섯 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설’은 국악기의 정의・종류・역사・편성・연주, 그리고 미적 특성이 간략하고 짜임새있게 정리되어 있다. 특히 총설을 번역한 ‘영문 서머리’는 한국음악에 관심있는 외국인 독자들에게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본문은 현악기 아홉 종, 관악기 열다섯 종, 타악기 서른여섯 종 등 모두 육십여 종의 악기에 대한 내용을 상세하게 다뤘다.
방대한 내용을 담았지만 읽기에 부담스럽거나 어려운 책이 아니다. 전문적인 내용도 쉽게 전달하는 저자의 친화력있는 문체는 이 책이 지니는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의 저자 송혜진은 음악을 연주하는 도구에 대한 ‘역사적 사실적 기술’과 함께 악기가 입고 있는 ‘문화의 옷’을 설명하여, 국악기에 표현된 한국인의 마음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으며, 여러 시대, 여러 계층 사람들의 악기 이야기와 여러 갈래의 미술품 등을 두루 섭렵하여 자료를 모으고 정리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악기를 노래한 시와 시조, 옛 문인들의 격조있는 樂會의 기록, 판소리나 巫歌의 사설에 묘사된 놀랍도록 생생한 악기 소리의 의성어는 읽는 이로 하여금 단숨에 그 악기가 연주되던 ‘그때의 그곳’으로 안내한다. 자연스럽게 그 악기에 접근하고 나면, 이어지는 글에서 악기의 유래와 전승, 구조와 제작방법, 연주법, 조율과 음역 등 현재까지의 학계의 연구성과를 집약한 상세한 설명을 통해 악기의 면면을 심도있게 이해할 수 있고, 장구한 한국음악사에서 악기가 어떤 위상을 가지고 어떤 모습으로 전승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각 장의 ‘사진으로 보는 현악기’ ‘사진으로 보는 관악기’ ‘사진으로 보는 타악기’는 이 책의 악기도감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이 소장한 국악기와 국악의 名人을 비롯한 연주자들의 연주 모습을 담은 원색도판은 악기의 외면을 객관적으로 충실히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우리의 소리를 머금어 온 악기의 내면까지 깊이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의 품격을 한층 높이고 있는 이 도판들은 제작과정을 담은 도판과 함께 우리 시대의 국악 문화를 기록한 자료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를 더할 것이다. 강운구는 『장욱진 먹그림』 『최종태 교회조각』 등에 이어 이번 책에서도 책의 가치를 한층 빛내주고 있다.
또한 악기의 전승을 보여주는 참고도판, 악기의 구조와 부분 명칭을 보여주는 도해, 악기의 제작방법을 차례대로 보여주는 장인들의 악기 제작과정 도판, 그리고 악보와 표 등이 풍부하게 제시되어 있어 독자의 이해를 심화했다. 부록으로 수록된 ‘한국음악사 주요 연표’와 ‘국내외 소장 주요 국악기 목록’은 이 책의 자료적 가치를 한층 더하고 있는데, 유물 악기의 정확한 측정을 위해 본사의 편집자가 청주대학교로 출장을 가는 등 최대한의 정확성을 기했다.
국악에 대한 입문서이자 전문서인 이 책은 국악을 잘 모르는 독자가 국악 전반을 이해하고 국악을 사랑하는 데 훌륭한 지침서가 될 것이며, 국악을 전공하는 연주자나 연구자는 국악기에 대한 체계적・심층적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또한 영문 서머리와 각 악기의 영문 소개글, 영문이 병기된 악기 도해는 외국인이 국악에 접근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한국 악기』가 좁게는 우리 국악계에, 넓게는 우리 문화계에 뜻깊은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5. 국내외 유명 사진가들과의 만남, ‘열화당 사진문고’

사진예술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인식은 물론 접근조차 어려웠던 80년대에, 열화당에서는 국내외 사진가들의 예술성 높은 사진들을 가려 엮은 ‘열화당 사진문고’ 시리즈를 출간하여, 사진예술의 저변확대에 큰 공헌을 한 바 있고, 많은 독자들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1999년 해외 저작물에 대한 국제저작권법이 국내에 전면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아쉽게도 사진문고 열세 권을 절판해야 했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진예술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져 갔고, 열화당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기존의 소중한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열화당 사진문고’를 기획 출간하게 된다. 영국 파이든 출판사의 사진문고 ‘55’ 시리즈의 번역 출간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는, 과거와 현대의 모든 양식과 범주의 사진을 포괄하여 사진가와 작품을 밀도있게 다룬 아름다운 포켓 사이즈의 시리즈로, 시리즈 한 권 한 권은 세계의 뛰어난 사진가들의 엄선된 작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사진 인생의 궤적을 따라가는 일대기 형식의 작가론과, 작품 하나하나의 감상을 위해 덧붙여진 코멘트, 작가 연보 등으로 밀도있게 구성되어 있다.
2002년 12월, 가브리엘레 바질리코, 베르너 비숍, 워커 에번스, 낸 골딘, 앙드레 케르테스, 도로시아 랭, 이드위어드 머이브리지, 유진 리처즈, 유진 스미스, 도마쓰 쇼메이 등 열 명의 사진가로 시작한 ‘열화당 사진문고’는, 이후 2003년 12월에 외젠 앗제, 메리 엘렌 마크, 라즐로 모홀리-나기, 에드 반 데르 엘스켄, 조엘-피터 위트킨 등 2차분 다섯 권을, 2005년 4월에 요제프 수덱, 마누엘 알바레스 브라보, 데이비드 골드블라트, 보리스 미하일로프, 조엘 마이어로위츠 등 3차분 다섯 권을 선보였으며, 2003년부터 현재까지 최민식, 정범태, 강운구, 구본창, 황규태, 민병헌 주명덕, 이정진 등 여덟 명의 국내 사진가, 그리고 2008년 장자오탕, 장차이 등 두 명의 대만 사진가를 포함시키면서 현재 서른 권에 이르고 있다.
특히 『장자오탕』과 『장차이』는 번역서가 아니라, 출판사에서 직접 현지 작가섭외, 작품선별, 원고의뢰 등의 전 과정을 진행하여 출간한 책이기에, 외국작가를 번역서로만 접근하던 우리 출판의 한계를 극복해낸 작지만 모범적인 성공사례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그 동안 우리 사진계가,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어서 운명적으로 비슷한 역사적 배경과 감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서구사진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아시아 사진가들에 소홀해 왔음에 주목, 그 첫 움직임을 시작한 책이라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뒤이어 중국 사진의 일세대 사진가들인, 중일전쟁의 참혹한 현장을 기록한 사페이와 중국 서부 소수민족들을 아름답게 카메라에 담아낸 좡쉐번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도 동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의 사진가들을 발굴 소개하는 작업을 꾸준히 시도해 나갈 예정이다.
또한 한국 사진가들의 목록도 조금씩 늘려갈 계획으로, 예술가들의 초상, 장승, 白民 등의 연작으로 알려져 있는 육명심, 서울 도심의 골목안 풍경을 평생의 테마로 삼았던 김기찬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진의 일세대, 이세대들을 소개했다면, 이제 삼세대 작가들을 비롯 젊은 작가들까지 그 영역을 넓혀 나갈 것이다.

6. 한국복식, 그 참모습과 아름다움의 기록, 『우리 옷과 장신구』

한 민족의 복식은 주로 자연환경과 생활방식에 의해 그 재료・형태・양식・제작방식 등이 결정된다. 이러한 옷과 장신구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사람들의 생활문화, 사회제도, 경제적 척도, 정치상황 등은 물론, 유행과 정서, 염원, 미의식까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복식은 그 시대의 작은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어떠한 옷과 장신구를 입고 사용했으며, 그 재료와 제작방식은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까. 그리고 이러한 전통복식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동시에 실용성은 어떻게 추구했을까. 『우리 옷과 장신구』는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師弟三代의 학연이 근 오십 년의 세월을 기다려 탄생시킨 책으로, 조선조 생활복식 유물을 중심으로 우리 옷과 장신구의 원형과 실제 그리고 거기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다각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복식도감이다.
이 책의 잉태는, 이화여자대학교에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복식사 강좌가 개설되던 1955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한국복식사를 담당하던 유희경 교수가 전국에 산재해 있던 복식사료들을 수습하기 시작했고, 그 작업은 계속해서 후학들에 의해 이어져 근 오십 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의 방대한 컬렉션이 되었으며, 그 결실의 핵심들이 고스란히 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인 것이다. 복식사학계의 일세대라 할 수 있는 유희경 교수와 이세대인 이 책의 저자 이경자・장숙환 교수, 삼세대인 홍나영・이미량 교수가 바로 이 책의 산파 역할을 한 사제삼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크게 총론과, 본문에 해당하는 ‘쓰개-冠帽’ ‘머리 장식-頭飾’ ‘몸 장식-佩飾’ ‘신발-履’ ‘웃옷-上衣’ ‘아래옷-下衣’ ‘겉옷-外衣’ 등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론은 우리 옷과 장신구의 발자취를 개괄하는 내용으로, 상고시대에 성립된 기본양식이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우리 복식을 남자 복식의 ‘점잖음’과 여자 복식의 ‘정숙함’으로 특징지어 서술하고 있다. 본문의 토대가 되는 것은 복식 유물의 정확한 실측・제도・드로잉이다. 거기에 실물의 형상과 질감이 생생히 느껴지도록 촬영된 사진, 그리고 이러한 시각자료들 하나하나에 예민한 관찰력과 통찰력으로 씌어진 기록과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특히 일일이 수작업으로 그려진 드로잉들은 복식 유물의 세부 묘사와 만듦새 등을 보여주는 데 더없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각 장의 말미에 붙여진 클로즈업 사진들은 대표적인 유물의 형상・색상・질감 등을 생생히 전달해 준다. 이러한 다양한 시각자료들과 글은, 옛 복식 유물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도 그 형상과 크기・색상・특징・만듦새・쓰임새, 그리고 복식의 문화사까지 파악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상호 유기적으로 배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간 복식 관련 서적은 주로 텍스트를 중심으로 복식사를 개괄적으로 다룬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런 책들과는 달리 이 책 『우리 옷과 장신구』는 600여 컷의 드로잉과 200여 컷의 사진 등 방대한 시각자료가 중심이 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실물을 쉽게 접하기 어려운 일반 독자들은 물론 복식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우리 옷과 장신구의 제작과정의 전승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 옷과 장신구에 관심있는 외국독자들을 위해 총론과 각 장의 글을 모두 영문으로 옮겨 실었으며, 유물 명칭에도 한자와 영문을 함께 표기했다. 이러한 모든 작업들은 우리 복식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며,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정확하고도 온전하게 기록・보존하기 위한 것으로, 바로 여기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

7. 최초의 한국미술 통사,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

1929년, 독일인 안드레 에카르트(Andre Eckardt, 1884-1971)가 조선미술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집필한 『조선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는 무엇보다도 ‘최초의 한국미술 통사’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물론 조선미술에 대한 논문으로 安廓의 「조선미술」(1915), 朴鍾鴻의 「조선미술의 사적 고찰」(1922-1923)과 같은 글이 앞서 발표되긴 했지만 이들은 한국미술 전체를 아우르지는 못했고, 일본인 미술사학자 세키노 다다스(關野貞)가 쓴 『조선미술사』(1932)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지만 에카르트의 저서가 그보다 3년 빠른 것이었다.
이 책의 번역은 그간 드물게도 안드레 에카르트의 미술사관에 관해 연구해 온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권영필 교수가 맡았는데, 처음 작업을 시작한 것이 1999년이었으니 근 4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셈이다. 역자 권영필은 우선 『조선미술사』가 집필되던 당시의 국제적 학문정세를 파악하는 것으로 이 작업을 시작했는데, 실제 번역에서도 1929년 초판 발행되었던 독문본과 영문본 모두를 底本으로 삼았고, 1995년 번역 발행되었던 일문본도 도움자료로 삼는 등 번역에 완벽을 기했다. 또한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탓에 정보의 보완, 용어의 손질, 새로운 편년, 역주 설정 등의 작업을 포함시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최대한 이해를 돕고자 했다.
70여년 전에 외래인에 의해 씌어진 이 책이 한국미술사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실로 크다. 첫번째로는, 20세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실로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이했던 세계미술사 연구가 이 책 『조선미술사』와 결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앙아시아 고고미술품에 대한 서구 열강들의 발굴과 더불어 그에 대한 이론적 연구에 관한 것인데, 이를 통해 한국미술사를 조명하는 시야가 넓어진 점이다. 더욱이 에카르트는 독일의 알베르트 그륀베델, 알베르트 폰 르콕 등의 발굴 성과를 직접적으로 섭렵함으로써 고대 한국미술의 외래 영향과의 연관성을 단순히 동아시아권에 가두어 해석하는 편협함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둘째, 『조선미술사』가 담지하고 있는 500여점의 방대한 국내외 도판자료들이다. 저자 에카르트는 본래 동양의 언어학, 고전학, 철학 등을 연구한 인문학자였음에도 그의 미술사 연구의 방향은 철두철미 작품 자체에 의존하는 실증주의로 일관했던 진보적인 사관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 자료들의 수집을 위해 세계 굴지의 박물관들을 답파했고, 여러 박물관들과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특히 건축물과 유적들 중에는 오늘날 더 이상 유존되지 않는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사료적으로 매우 귀중한 것들이다. 셋째, 도자기를 포함한 공예품이 비중있게 다루어진 점이다. 미술에서 ‘마이너 아트’의 개념이 사실상 종식된 것은 2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활동했던 양식론자 알로이스 리글에 의해서이다. 그는 공예품에 나타난 문양에 주목하면서 미술에서 공예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높였다. 이 책에서 공예품을 비중있게 다룬 것을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취향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근대적 시각의 작용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리 미술사의 고전이라 할 이 책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가 이 분야의 연구자는 물론, 한국미술에 관심을 갖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미술학도들에게 우리 미술사 연구에 새로운 기반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8. 현대미술의 이론적 토대를 새롭게 조명한 ‘현대미술운동총서’

1988년부터 5년여에 걸쳐 30권의 ‘20세기미술운동총서’를 기획 출간했던 열화당은, 2003년말 현대미술의 새로운 메카인 영국의 테이트 갤러리와 공동으로 한층 정련되고 깊이있는 또 하나의 야심찬 시리즈 ‘현대미술운동총서’를 선보이기에 이른다. 이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테이트 갤러리에서 발행한 시리즈로, 테이트 모던의 건립 추진과 더불어 시행된 일련의 새로운 움직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리즈는 기존의 미술사를 정리하고 오늘날의 시각으로 재점검함으로써 새로운 이론적 토대를 다지고, 현대미술의 배경을 이루는 여러 미술사조 및 거기서 태어난 작품들을 전공자 및 대중에게 보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기획되었다.
19세기말과 20세기의 주요 미술운동을 다루고 있는 이 시리즈는 각 시기 미술운동의 배경과 출현부터 주요개념과 사상, 전개과정, 이후에 끼친 영향까지 비평적 관점에서 핵심적이면서도 개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미술 전문가뿐 아니라 예술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이에 접근하고자 하는 일반인까지, 그 독자층을 확대시킨 대중적인 미술이론서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정평있는 미술사학자, 전시기획자, 미술잡지의 편집자들에 의해 집필된 이 시리즈는, 해당 미술운동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에 머무르지 않고 저자 자신의 견해를 포함해 오늘날 거론되고 있는 다양한 관점들을 쟁점적으로 소개한다. 또한 일반 미술이론서들이 갖추지 못한 현장성을 비롯해, 기존의 미국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난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한편 각 권마다 세계 각지에 소장되어 있는 대표적인 현대미술작품들을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내용적 충실함과 함께 시각적 즐거움도 선사하고 있다. 시원한 판형과 레이아웃, 콤팩트한 볼륨 등은 ‘현대미술’이라는 주제에 친근감있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이다. 이 시리즈의 번역은 강단과 전시기획 등 국내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소장학자들이 맡았다.
이 시리즈의 각권은 해당 미술운동의 시대별 흐름, 쟁점과 핵심주제 등에 따라 일목요연하고 일관적인 흐름으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책의 첫 머리에서 해당 미술운동이 태동하게 되는 배경과 시대상황 등이 개괄적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이전 시대의 미술운동의 영향 및 동시대에 일어난 다른 미술운동과의 밀접한 연관 아래 서술되고 있다. 또한 마지막에는 해당 미술운동을 정리하고, 남은 과제, 이후의 영향 등을 이야기하는 결론 부분으로 끝을 맺는데, 이 역시 이후 발생하는 미술운동의 흐름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즉 하나의 미술운동을 소개하면서 앞뒤의 배경과 영향 그리고 동시대에 일어난 다른 미술운동을 동시에 설명하고 있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대미술운동을 입체적인 시각으로 정리할 수 있게 해준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현대미술의 개념은 좁은 의미에서 제2차세계대전 이후, 즉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술을 가리키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현대미술은 이미 19세기말과 20세기 전반기에 일련의 전위적인 미술운동과 함께 싹트기 시작했고, 2차대전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들 미술운동들이 내세운 사상이나 지향한 바, 강도 등의 차이는 있으나, 르네상스 이래 가꾸어 온 전통적 미술을 거부하고 새롭고 실험적이며 혁신적인 미술을 추구했다는 데 그 공통점이 있다.
이렇듯 근 한 세기 동안의 미술의 흐름을 정리함에 있어서 ‘현대미술운동총서’는 중요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한 후기인상주의, 큐비즘, 표현주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팝 아트,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포스트모더니즘, 리얼리즘, 모더니즘, 추상미술, 추상표현주의, 아르테 포베라 등 열네 가지 주제만을 선별하여 다루고 있다. 이는 지역적인 특색이 뚜렷한 사조와 여러 사조에 중복되는 주제를 제외시키거나 부분적으로 다룸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현대미술을 낱낱의 사조만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심과 주변을 명확히 하여 전체의 윤곽을 그려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9. 소설과 에세이로 만나는 우리 시대의 거장 ‘존 버거’

2004년 4월 열화당에서는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존 버거(John Berger, 1926- )의 에세이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을 펴냈는데, 이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에세이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과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처녀소설 『우리 시대의 화가』,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부커상 수상작 『G』와 최근작 『A가 X에게』, 그의 유일한 시집 『아픔의 기록』 등 모두 여덟 권의 책을 내게 된다.
존 버거는 현존하는 영국 출신 작가 중 가장 깊고 넓은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또 가장 광범한 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으로 꼽힌다. 처음 미술평론으로 글쓰기를 시작해 점차 관심과 활동 영역을 확장하여 예술과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깊고 명쾌한 관점을 제시해 온 그는, 중년 시절 영국을 떠나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농촌 마을로 들어가 근 삼십 년을 살고 있다. 노동과 글쓰기, 농부와 작가, 은둔과 참여를 아우르는 그의 삶은 어떤 대안적 푯대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어서, 그보다 앞서 살다간 미국의 스콧 니어링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은 그 동안 그가 다뤄 왔던 여러 주제들을 포괄, 함축하여 보여 주는 것으로, 특히 근대의 과학적이고 계량적인 시간관, 그리고 문명과 도시화에 의해 ‘시간’과 ‘공간’ 모두로부터 분리되어 버린 인간 소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은 자신이 직간접으로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을 치밀한 시각적 산문을 통해, 마치 사진을 찍듯이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 스스로 ‘포토카피(사진복사)’라고 이름 붙인 이 글들은, 세기말 인간사의 단편을 구성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상황과 내면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포착한다.
『우리 시대의 화가』는 1950년대의 다급했던 시대 상황에 부응하면서 동시에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담아 써낸 존 버거의 첫번째 소설이다. 작가 스스로 말하듯이 이 책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졌을 만큼 이후 존 버거라는 대작가의 탄생을 알리게 된 의미있는 책이며, 그렇게 해서 태어난 책은 50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세계의 여러 독자들에게 변함 없는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여든의 나이가 된 존 버거의 신작으로, 자신과 동일한 이름・나이・배경을 지닌 주인공을 등장시킴으로써 자전적인 요소를 가미한 소설인데, 픽션과 에세이의 경계를 허물고 자유로운 허구성과 실제 삶이 밀착된 구성으로, 세월이 흘러도 희미해지지 않고 반대로 점점 더 명료하고 새롭게 되살아나는 기억,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그들의 삶이 우리 삶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와 있음을 잔잔하게 일깨워 주고 있다.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는 오늘날 세계를 점령한 탐욕과 독재에 관하여, 이로 인한 고통에 관하여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써내려 간 열여섯 편의 글을 묶은 에세이집이다. 삶과 예술에 관한 철학과 성찰을 보여주었던 다른 저작들과는 달리, 이 책에는 존 버거의 정치적 시각, 이념적 지향들이 짙게 깔려 있다. 9・11 테러,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독재 행위들을 통해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不正義, 거짓 희망, 새로운 형태의 독재를 고발하고, 나아가 이러한 전제주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꿈꾼다.
『G』는 1972년 발표 이래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번역 소개되는 책으로, 부커상 외에 가디언 소설상, 제임스 타이트 블랙 기념상 등을 수상한 존 버거의 대표작 중 하나다. 실험적 구성과 섬세한 필치로 주인공 G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역사 속의 사적인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이 책은 작가의 말대로 역사의 전환점들을 그린 지도, 인간의 몸, 여성성과 남성성을 표시한 지도와도 같다.
『아픔의 기록』은, 자신의 거의 모든 책에 자신의 시를 슬그머니 끼워 넣고는, 시인으로서의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던 존 버거의 첫번째이자 유일한 시집이다. 그의 주된 집필 활동은 산문을 통해 이루어져 왔지만, 무력감이라는 또 다른 불가항력에 의해 씌어진 시들은 그 고유의 의미와 무게를 지닌다. 그의 시를 번역한 문학평론가 장경렬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자신의 산문 여기저기서 선보이고 있는 시들은 정녕코 산문에 덧붙인 장식품으로 여겨질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내가 『아픔의 기록』 번역 작업에 온 마음으로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인’으로서의 버거에 대한 나의 이같은 믿음이 어느 때도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지로 씌어진 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A가 X에게』는, 약제사인 아이다(A)가 반정부 테러 조직 결성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받고 독방에 갇힌 자신의 연인인 사비에르(X)에게 쓴 편지와 그 편지 뒤에 적힌 그의 메모로 이뤄진 이야기다. 서두에서 존 버거 자신이 직접 등장해 이 편지와 메모들을 어느 폐쇄된 교도소에서 발견했음을 밝히고 있어, 기존에 나온 그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며 시작한다. 2008년말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폭격으로 1,300여 명의 팔레스타인 사망자가 발생한 사실에 분노하고 저항하면서 인터넷에 글을 올렸던 존 버거는, 현실사회의 문제들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이 소설을 통해 두 남녀가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독자의 현실로 가져와 함께 고민해 보자고 말을 건넨다.
출판사의 발행인과 편집자는 2008년 3월, 프랑스 파리 근교의 앙토니에 위치한 존 버거의 친구 넬라 비엘스키의 집에 초대받아 저녁 한때를 그와 같이 보내며 우정을 나눈 바 있는데, 이렇듯 몇 권의 책을 만들면서 출판사와 존 버거는 어느새 먼 곳에서나마 서로에게 존경과 애정을 보내는 사이가 되어, 존 버거는 출판사의 창립 35주년을 기념하여 〈매그놀리아〉 그림을 직접 그려 보내 주었고, 출판사는 그 작품으로 아름다운 노트를 만들었으며, 그리고 다시 창립 40주년에 맞추어 〈붓꽃〉 그림을 선사했다. 현재 그의 대표적인 미술이론서인 『어떻게 볼 것인가』(최민 옮김), 그리고 신작 『벤토의 스케치북』 등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10. 한국 샤머니즘의 정수, 『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

한국의 기층문화 가운데 ‘생명력의 원천’이라 일컬어지며 우리 삶의 한 원형으로 존재해 온 무속은 예로부터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녀 왔다. 죽은 이들의 넋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나누는 삶의 희로애락 속에도 서려 있고, 조상들의 영혼은 대대로 후손들을 굽어본다고 믿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현실생활에서 재난과 불운을 물리치고 안녕과 복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당이라는 매개자로 하여금 신령을 모시게 하여 그들의 힘을 이용해야 했다. 이러한 목적이 반영된 의례절차가 바로 굿이며, 이는 오랜 세월에 걸친 역사적 경험의 토대 위에서 민족의 생명력이 충만한 문화형태로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산업화와 서구화를 거치면서 굿은 삶의 원천이라기보다는 심리적 퇴행이나 종교적 미신으로 왜곡되었고 근대화된 사회에서 버려야 할 구습의 하나로 질시를 받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미신타파’라는 정책적 억압으로, 굿이 지닌 문화적 정신적 가치는 도외시됨으로써 굿은 그 명맥이 끊어질 위기를 맞이해야만 했다. 이러한 온갖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도 무속 문화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 원형을 보존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수남이다. 무속 사진 분야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일구어낸 그는 1970년대부터 십여 년 간 우리나라 전역에서 벌어지는 굿판을 발로 뛰어다니며, 삶의 희로애락이 너울거리는 굿판의 생생한 현장을 사진에 담아 왔다.
1983년에 시작해 1993년에 완간한 ‘한국의 굿’ 시리즈는 20권의 분량과 돋보이는 북디자인, 내용의 충실함 등으로 그 당시 출판계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로부터 파격적인 기획이라는 평을 받은 적 있었지만, 정작 평가받아야 할 것은 당시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한국의 샤머니즘에 대한 관심과 주목이다. 이러한 점이 뒤늦게 빛을 발하여, 오늘의 첨단문명 속에서 샤머니즘에 대한 관심은 옛것에 대한 단순한 향수가 아닌, 종교학적 문화인류학적 관심으로서 대두되었다. 그 동안 사진작가 김수남은 무속사진에 대한 관심영역을 끊임없이 확장시켜 왔고, ‘무속 사진’ 하면 두말할 것 없이 김수남을 떠올리게 되었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주빈국 행사의 일환으로 ‘한국의 책 100’에 선정되어, 국문판과 영문판이 동시에 발간된 『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는, 이전의 시리즈 20권에서 대표적인 사진들을 엄선하여 한 권의 책에 새로운 편집으로 담아 보여준, 한국의 굿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굿은 산 자의 고통과 슬픔, 죽은 자의 원과 한을 달래며 서로의 아픔과 위로를 나누는 공동체의 의식이다. 삶의 질서가 깨져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민족은 굿을 통해 심리적 위안을 얻고 맺힌 삶을 풀어주며 신명과 역동적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 사이에서 굿의 온전한 의미와 가치가 점점 잊혀져 가는 동안, 김수남은 굿이 벌어지는 현장을 누비며 관찰자나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굿판에 융화된 동참자로서 함께 어울렸다. 굿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그는 며칠 혹은 몇 주일을 무속인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머물렀고 그들 사이에 섞여 가슴을 나눈 뒤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흐느낌, 심장 박동소리와 땀 냄새마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한 역동적이고 극적인 장면들을 포착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일구어 온 그의 이러한 서사적 다큐멘터리는 굿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 진심 어린 애정이 없었다면 해내기 힘든 작업임에 틀림없다.
사진작가 김수남은 이 책의 출간에 대한 감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95년 『한국의 굿』 완간으로 히가시카와(東川) 사진상 해외작가상을 받고 전시회를 가졌다. 그러고 십 년이 지난 2005년, 삼십 년 전에 꿈꿨던 사진집을 낸다. 그리고 독일로부터 「한국의 굿」 개인전 초대를 받고, 베를린 문화회관에서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굿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내가 사진 찍은 많은 큰 무당들이 이 세상을 떠났고, 그로 인해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라져 버린 굿도 많다. 그러나 지금도 몇몇 지역의 굿은 계속되고 있다. 나는 굿의 그 끈질긴 생명력을 과소평가했었던 것이다. 지금 나는 아시아의 굿판을 돌아다니며,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굿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근 1년여의 사진 선별과 편집, 번역 작업에 사진작가는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임했는데, 이 책이 그의 마지막 遺著가 될 줄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독일에서의 도서전과 전시를 마치고 한국에서 또 한 차례의 굿 사진전으로 그야말로 ‘한국의 굿’의 선풍을 일으켰던 김수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무속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태국 치앙라이로 떠났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는 현장에서 사진을 찍다가 최후를 맞는 일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라던 평소의 말 그대로 마지막 순간까지 카메라를 잡은 채 세상을 떠났다. 『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는 우리 시대의 뛰어난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수남이 지난 시대의 무속을 살아 있는 신화로 승화시킨 기록물로 평가된다.

11. 160년간의 미술사를 집대성한 ‘한국근현대미술의 역사’

지금껏 출간된 몇 안 되는 한국 근현대미술사 관련 연구서들은 작품, 작가론 및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문헌사료에 대한 기초조사가 빈약한 조건에서 행한 해석이라는 데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따라서 연구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객관성을 잃은 주관적 해석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1990년대초 우리 근현대미술에 관한 문헌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해 근 15년만에 완성된 미술평론가 최열의 ‘한국근현대미술의 역사’(전2권)는 여러 면에서 기념비적인 책으로 평가된다. 우선, 이 두 권의 책은 1800년부터 1961년까지의 모든 문헌자료에 대한 기초조사와 문헌비판 과정을 충실히 했다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삼고 있다. 이는 지금껏 그 필요성은 인식했지만 어느 누구도 엄두내지 못한 방대한 작업이었는데, 저자는 이러한 작업에 15년이라는 세월을 아낌없이 바쳤고, 그 결과 우리 미술계는 하나의 거대한 근현대미술 지도를 갖게 되었다. 이 책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저술의도를 밝혔다.

“나는 이 책을 우리나라 근현대미술 지도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사실을 시대순으로 늘어놓는 그런 지도나 연표 만들기가 아니라, 圖畵署 畵院들이 그린 그림지도 같은 것을 그리고 싶었다. 그 그림 안에는 사람과 사건도 보이고, 작업실 풍경과 교육기관, 미술관이나 박물관, 전람회 풍경은 물론, 숱한 이론가들이 모인 사상의 전당도 보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나는 의식의 지도를 그리고 싶었다. 시대의 움직임과 그에 대응하는 미술가의 의식, 집단의 활동과 흐름을 통해 가치있는 무엇인가를 추적하고자 했다.”

첫째 권 『한국근대미술의 역사』가 선을 보인 것은 1998년이었고, 이듬해 저자는 이 책으로 제2회 한국미술저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19세기 중엽을 근대미술의 기점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서양회화 이식을 근대 기점으로 내세우는 기존의 관점에 대한 도전이었다. 따라서 지금껏 방치하다시피 했던 19세기의 회화, 조소예술의 근대성을 밝히고자 했고, 유화 및 서구 조소도 그같은 근대적 변화의 연속선상에 자리잡고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는 점이 이 책의 한 특징이라 하겠다.
첫째 권이 나오고 근 십 년이 흐른 2006년, 1945년부터 1961년까지를 다룬 후속권 『한국현대미술의 역사』가 출간되면서 저자는 그간의 근현대미술사 연구의 일단락을 지었다. 그야말로 방대하고 지난했던 조사와 연구의 결실이었다. 여기에서 ‘한국근현대미술의 역사’(전2권)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두 권의 책은 연대기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국미술 연구사상 누구도 취하지 않았던 이 방식은, 매 시기 미술계를 한눈에 헤아릴 수 있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더구나 1919년부터 1961년까지 43년간은 한 해 단위로 “이론활동 / 미술인 / 단체 / 교육기관・행정기관 / 미술관・박물관・화랑 / 전람회” 등의 틀로 세분했다. 또한 이 책은 근현대미술사 사전 구실을 하도록 구성했다. 모든 항목을 상세하게 나눠 소제목을 붙임으로써 목차의 세부항목이 곧 키워드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인명색인과 단체색인도 이러한 사전적 역할을 강화하며, 특히 매 시기별로 모아 놓은 주석은 ‘한국 근현대미술 문헌 총목록’ 구실을 하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기존의 통설 또는 상식을 상당 부분 수정하고 있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서화협회는 고희동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새로운 자료와 해석을 통해 서화협회 주도세력을 오세창-안중식-이도영으로 바로잡아 체계화했다. 또한 19세기 중엽 화단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는 조건에서 지금까지는 추사 김정희와 그의 예술관이 화단을 지배해 온 것으로 정리하고 있었으나, 19세기 중엽 신감각파를 이끈 서화계 영수 조희룡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그의 업적과 위치, 중요성 등을 밝혀 놓은 것은 새로운 견해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이른바 ‘친일미술’에 관해서 1940년부터 ‘전시체제미술’이란 항목을 만들어 이미 알려진 사실은 물론, 새로운 사실을 발굴해 대폭 확장해 놓았다. 또한 박물관・미술관・화랑의 발자취에 대해 처음으로 정리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비평활동에 대한 새로운 자료발굴과 체계화를 꾀했다.
이 책은 한국 근현대미술사학의 발전은 물론, 한국 미술사학의 모든 분야에서 튼실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게다가 낱말의 풀이 또는 용어의 해석이라는 일차원적인 사전의 형태를 뛰어넘어, 시대흐름과 객관적 사실자료, 해석과 비평이 살아 숨쉬는 한국 근현대미술사 사전으로서의 가치는 매우 큰 것이다.

12. 사진으로 쓴 30년 전후의 다큐멘터리,『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

강원도 원성군의 초가 마을 ‘황골’, 인제군의 너와집 마을 ‘용대리’, 전북 장수군의 건새집 마을 ‘수분리’ 등 1970년대에 찍은 세 마을과 마을사람들의 삶을 담은 강운구의 사진집 『마을 삼부작』이 출간된 것은 2001년이었다. 이때 강운구는 이미 이 세 마을이 “흔적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으므로, 정리해서 사진으로서의 흔적이라도 남겨 둬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라고 출간의 이유를 밝힌 바 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2006년, 강운구의 『마을 삼부작』과, 그 세 마을의 30년 후의 모습을 담은 권태균의 『강운구 마을 삼부작 30년 후』를 함께 묶어 출간했다.
지난날 개발과 근대화, 산업화라는 국가적 시대적 사명감(?)으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터전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가. 우리의 삶을 영위해 나갈, 밥먹고 잠자고 그 밖의 온갖 생활이 이루어지는 집의 모습은, 주거의 방식은 어떻게 변했는가. 그리하여 우리의 생활방식은 어떻게 변모했으며, 궁극적으로 이러한 변화된 모습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70년대 강운구가 찍은 마을과 30년 후 권태균이 다시 찍은 그 마을-시간과 거리에 관한 다큐멘터리’라는 다소 긴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질문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위한 그 첫 걸음으로서, 세 마을의 30년 전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우리의 삶의 터전에 우리가 행한 ‘짓’들을 낱낱이 증거해 주는 다큐멘터리 사진집이다. 여기서의 기록(다큐멘터리)은 ‘역사적 기록’이나 ‘예술로서의 기록’뿐만 아니라, 세 마을의 변화를 통해 그 동안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터전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그리하여 우리 삶의 모습이 얼마나 황폐해졌는지를 증거하는 ‘사회학적 기록’이며 ‘문화사적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독문학자 문광훈은 이 책 서두에 쓴 글 「우리 삶이 지나온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무한질주의 변화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우리의 농촌과 두메산골을 어떻게 바꾸고, 집과 골목과 거리, 강과 오솔길과 산등성이를 어떻게 파괴했으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훼손시켰는지를 이 사진집은 증거해 준다. 그것은, 낱낱의 장면적 대비가 보여주듯, 온통 철거와 붕괴, 오염과 파손의 현장이었다. …결국 우리가 얻게 된 것은 몇 가지 안락과 편리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이상의 상실을 덤으로 감내해야 했다. 자유와 민주주의만큼이나 더 근본적인 상실은 아마도 사람 사이의 인정(人情)과 자연적 유대, 이런 것들 속에 배어 있는 어떤 따스함과 정겨움일 것이다.”

두 사진집을 통해 우리 삶의 변화는, 그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파괴와 훼손의 현장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농사지으며 엿을 고아 팔던 소박했던 황골 사람들은 모텔, 노래방, 식당 등 관광객을 상대로 한 한철 장사치로 전락했고, 내설악의 너와집 마을 ‘용대리’는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행해진 ‘산간 불량주택 철거’라는 이름하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며, 건새집이라는 독특한 주거방식을 지켜 오던 수분리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국적불명의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담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강운구의 말대로 “예전엔 가난해도 풍족해 보였는데, 지금은 풍족한지는 모르지만 가난해 보인다.”
강운구와 권태균, 두 사진가는 우리 사회가 겪어 온 개발의 논리가 얼마나 허구였는지를, 근대화와 산업화가 가져온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 것이었는지를 이 두 권의 사진집을 통해 극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두 사진가는 이러한 외침이 “이 사진을 보라, 이 땅이 얼마나 망가졌는가?”라는 문제제기만으로 그치기를 원하지 않는다.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행위는 반드시 미래에 대한 의지와 태도로 귀결되어야 할 것이다. 30년 후에 또 다른 사진가가 이 세 마을을 기록할 수 있도록 GPS 좌표를 책 말미에 기록해 둔 세심함에서도 미래에 대한 두 사진가의 의지와 바람이 엿보인다.

13. 20세기 사진의 대가 브레송의 『내면의 침묵』과 『영혼의 시선』

1986년 ‘열화당 사진문고’를 통해 소개한 바 있었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2004년 8월 그의 타계 후 그의 전시가 잇달았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번번한 사진집이나 그의 글이 소개되지 않은 점에 주목하여, 그의 대표적 초상사진을 모은 사진집 『내면의 침묵』과 그의 사진에 관한 글을 모두 모은 『영혼의 시선』 두 권을 기획 출판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내면의 침묵』은, 2006년 1월 18일부터 4월 9일까지 파리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재단에서 개최한 「합의하에 찍은 피해자들, 그 내면의 침묵」 사진전과 더불어, 브레송 재단 소장품들로 제작한 첫번째 책으로, 브레송이 1931년에서 1999년까지 촬영한 총 94컷의 초상사진을 엄선해 묶은 것이다. 이 사진집에는 한 세기의 정신을 움직였던 시인, 소설가, 극작가, 화가, 조각가, 철학자, 과학자, 음악가, 가수, 배우 등의 석학과 문화예술계 인사들, 그리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영원한 찰나의 시선을 포착한 뛰어난 초상사진들로 빼곡하다.
브레송은 “나는 무엇보다 내면의 침묵을 추구한다. 나는 표정이 아니라 개성을 번역하려고 노력한다”라고 했는데, 그에게 초상사진은 “마치 십오 분, 이십 분간의 정중한 방문 같은 것”이었고, 당사자와의 이런 정대면한 대화, 침묵 속의 결투 속에서 그가 포착해내려고 한 건 그 ‘순간의 유괴’나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시적 동일시’가 아닌, 그 인물의 적나라한 ‘현존’ 그 자체였다. 동시에 이 사진들은 ‘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정지된 그 자신의 시선’으로서의 카르티에-브레송의 또 다른 자화상적 편린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책 서두에 실린 세계적인 현대철학자 장 뤽 낭시의 글에서는 초상사진 속 인물들의 침묵과 공간의 기하학적 시선을 따라가며 잡은 치밀한 사유가 대가의 사진과 함께 오랜 여운을 던져 준다. 더불어,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원판 인화작품을 복제하여 최상의 인쇄술로 프린트된 사진들은, 마치 전시장에서 사진가의 작품을 직접 대면하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며, 작품집으로서의 소장적 가치 또한 높이고 있다.
『영혼의 시선』은 1950년대초부터 1990년대말까지 근 45년간 책과 잡지 등에 실었던 사진 에세이를 묶어낸 카르티에-브레송의 유일한 著作으로, 글 중간중간에 실린 브레송의 대표적인 사진 11컷, 그가 생전에 원고를 직접 교정하고 덧붙였던 후기, 친필로 쓴 편지 및 아포리즘 등과 더불어 독자들에게 카르티에-브레송의 생생한 숨결을 전달하고 있다.
브레송은 “나에게 카메라는 스케치북이자, 直觀과 自生의 도구이며, 시각의 견지에서 묻고 동시에 결정하는 순간의 스승이다”라고 했는데, 이 책에 실린 사진에 관한 그의 깊은 생각 또는 단상들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성찰을 하게 한다. 이 책은 ‘찰나의 거장’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즉흥곡으로, 글로써 잡아낸 ‘결정적 순간’이자 빛나는 사유가 인화해낸 그의 내면일기라 할 수 있다. 그가 벌인 찰나와의 사투는 곧 사진의 운명이기도 한, 사라지는 모든 것들과의 싸움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그의 모든 사진이, 그에 의해 저격당한 듯, 포획된 듯, 꼼짝 않고 잡혀 있는 이 순간의 절정이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해, 이 책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그의 독백을 들려줄 것이다.

14. 만화로 만나는 박물관, ‘루브르 만화 컬렉션’

‘루브르 만화 컬렉션’은 가장 현대적이고 대중적인 시각매체인 만화로 ‘루브르’ 또는 ‘박물관’의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해내는, 루브르 박물관과 프랑스의 만화전문출판사 퓌튀로폴리스의 획기적인 기획물이다. 앙리 로이레트 루브르 박물관 관장은 “한 폭의 그림, 하나의 컬렉션, 혹은 박물관의 방 하나 또는 그 전체로부터, 이야기를 창조하는 작가와 예술작품 간에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그야말로 그들의 창조력과 상상력에 백지수표가 주어졌다”라는 말로 이 시리즈 기획을 설명하고 있는데, 세계 만화계가 주목하는 실험적 작가들이 각자의 상상력으로 그려내는 이 시리즈는, 루브르를 통해 맺어진 고전예술사와 만화, 예술작품과 만화가 등 각기 다른 시공간 사이의 만남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아 온 루브르가 아닌,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재현되는 새로운 루브르를 창조하고 있다.
니콜라 드 크레시의 『빙하시대』를 시작으로 마르크-앙투안 마티외의 『어느 박물관의 지하』, 에릭 리베르주의 『미지의 시간 속으로』, 베르나르 이슬레르와 장-클로드 카리에르의 『루브르의 하늘』까지 4권이 출간되었고, 현재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일본 만화가 아라키 히로히코의 『키시베 로한, 루브르에 가다』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시리즈의 첫 책 『빙하시대』에서 크레시는 우리를 모든 것이 얼어붙은 미래의 세계로 안내한다. 단절된 과거의 문명을 발견하기 위해 밤낮을 눈보라와 빙판을 달리는 미래 탐사대 쥘리에트 일행과 헐크는, 빙판 속에서 솟아오른,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을 보관하고 있는 루브르와 마주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루브르 소장품들에 대한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상상력과 해독은 독자들의 시지각을 교란시키며 통렬하고 유쾌한 웃음을 자극한다.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는 니콜라 드 크레시 특유의 그림체로 되살아난 루브르란 점이다. 작가는 미술관에 전시된 실제 작품들을 마치 實寫와도 같이 만화의 컷들로 끌어와 현장감있게 루브르의 내부를 비춘다. 이 작품은 독특한 상상력과 과감한 구성으로 만화와 회화의 장르간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만화미학의 탄생을 보여 준다.
크레시의 『빙하시대』가 유쾌한 상상력으로 미래의 루브르를 보여 주었다면, 두번째 권인 마티외의 『어느 박물관의 지하』는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질 배경 설정, 깊은 사유와 성찰에 기반한 뛰어난 상상력,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에 걸맞은 듀오톤의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그림으로 ‘예술의 본질’에 물음을 던진다. 주인공인 르 볼뤼뫼르와 그의 조수 레오나르에게는 이름조차 규정되지 않은 거대한 박물관의 측량과 감정이 맡겨진다. 박물관의 드넓은 지하층을 조사하면서 드러나는 예술의 기원과 모사・복원의 문제, 걸작을 둘러싼 비밀에 관한 만화가 마티외의 사유들은 예술에 관한 상식과 통념을 뒤집는 시적 상상과 철학을 전개하며, 지금껏 생각해 보지 못한 ‘예술의 본질’에 관한 문제들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에릭 리베르주의 『미지의 시간 속으로』에는 ‘예술’과 ‘예술가’ ‘예술작품’의 존재 외에 ‘관람객’의 시선이 더해진다.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품이 건네는 영혼의 소리를 듣도록 하기 위해 리베르주는 주인공을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하고 있다. 작품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듯이 보이지만 소외된 세 존재인 박물관 경비원과 청각장애인, 예술작품을 교묘히 겹쳐 놓고 그들 모두가 존재감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신비롭게 보여준다.
‘루브르 컬렉션’의 네번째 이야기 『루브르의 하늘』은 루브르가 박물관으로 탄생되기 직전의 급박한 정치적인 상황에서 시작된다. 프랑스 혁명기,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정신을 그림으로 그려줄 것을 다비드에게 주문한다. 공화국을 이끌어가는 이상을 이미지화하는 작업은 로베스피에르에게는 강박관념으로, 다비드에게는 결코 표현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임무가 된다. 이들을 중심으로 역사만화의 외양 아래 진행되는 이 이야기에는 미학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루브르의 하늘』은 속도감 있게 혁명기를 그리면서도 인상적인 단면을 적절히 배치하여, 혼란스럽게 돌아가던 격동기를 독자들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15. 한국미술사를 밝힌 등불, ‘우현 고유섭 전집’

우리 미술사학의 역사는 길지 않다. 서슬 퍼렇던 일제 치하, 혜성과 같이 등장한 又玄 高裕燮은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에서 미학・미술사를 전공했으며,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우리 미술사와 미학을 근대적인 방법론으로 학문화한 선구적인 학자였다. 그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같은 일본인 학자들의 한국미술에 관한 왜곡된 논의나 관점들을 날카롭게 지적했을 뿐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선적 사고와 시각으로, 엄격한 학문적 관점으로 우리의 미술을 조명하고 규명했다. 이렇듯 우리 미술사 연구의 문을 비로소 활짝 열어 젖힌 장본인이 바로 우현 고유섭이다.
열화당에서 ‘우현 고유섭 전집’(전10권)의 기획에 착수한 것은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흔 해라는 짧은 생을 살고 간 우현이 남긴 업적은, 6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못다 정리될, 못다 해석될 방대하고 심오한 세계였기에, 원고의 수집과 정리, 그리고 분석에 따른 전집의 구성에만도 두 해가 훌쩍 넘어갔다. 그리하여 그의 遺著들은 물론이고 그 밖의 수많은 미발표(미완성) 유고, 소장하던 미술사 유물・유적 관련 사진도판, 카드 기록, 직접 그린 도면과 소묘, 지도, 자료사진, 일기, 장서목록에 이르기까지, 우현 고유섭이라는 한 인간이 남기고 간 모든 업적과 그에 관한 자료들을 전집에 포함시키는 방대한 기획에 이르렀다. 그리고 크게 두 가지 원칙, 즉 우현의 全作과 모든 관련자료들을 모아 ‘全集’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구성으로 재편하여 보여준다는 것과, 난해한 글을 일반 독자들도 충분히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에 의해 이 전집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2007년 12월 제1・2권 『朝鮮美術史』 上・下, 제7권 『松都의 古蹟』을 선보인 데 이어, 2010년 2월 제3・4권 『朝鮮塔婆의 硏究』 上・下, 제5권 『高麗靑瓷』, 제6권 『朝鮮建築美術史 草稿』까지 출간했다.
총론편과 각론편 두 권으로 선보이는 『朝鮮美術史』는 한국미술사 관련 개별 논문들을 모두 모아, 고유섭 생전의 목표였던 조선미술 通史 서술의 체제에 맞게 ‘조선미술 총론’을 상권으로, ‘건축미술’ ‘조각미술’ ‘회화미술’ ‘공예미술’을 하권으로 각각 재편성한 것이다.
총론편인 제1권 『조선미술사』 上에는 고유섭이 조선미술 통사 서술을 의도로 집필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한 「조선미술약사」를 필두로, 조선미술 전반 또는 특정 시대의 미술에 관해 쓴 총론 형식의 글 열여덟 편이 실려 있다. 그 중 미발표 유고는 「조선미술사 序」 「조선미술약사」 「조선 조형예술의 시원」 등 세 편이며, 나머지는 경성제대 미학연구실 조수 시절에 발표한 「조선 古美術에 관하여」(1932)부터 개성부립박물관장을 역임하던 때에 발표한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 문제」(1941)까지 근 십 년에 걸쳐 씌어진 글들이다.
각론편인 제2권 『조선미술사』 下에는 ‘건축미술’ 아홉편, ‘조각미술’ 네 편, ‘회화미술’ 열한 편, ‘공예미술’ 아홉 편 등 총 서른세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 중 미발표 유고는 「백제건축」 「조선의 묘탑에 대하여」 「연복사종에 관한 略解」 「문헌에 나타난 고려 두 窯址에 대하여」 등 네 편이며, 나머지는 경성제대 졸업 직후 미술사 관련 글로는 가장 처음 발표한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1931)부터 고유섭이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에 발표한 「불국사의 사리탑」(1943)까지 십여 년에 걸쳐 씌어진 글들이다.
『朝鮮塔婆의 硏究』는 우리나라의 고대 조형을 대표하는 탑에 관한 최초의 학술적 논의이자, 한국미술사 연구사상 초유의 역작으로, 고유섭의 우리 미술사 제분야에 대한 연구 중 으뜸으로 자리매김된다. 제3권 『朝鮮塔婆의 硏究』 上은 한국 탑에 관한 총론으로, 저자가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震檀學報』에 발표했던 「조선탑파의 연구」를 제1부로, 같은 제목으로 별세에 이르기까지 한층 발전된 내용으로 진행하던 미발표 日文 원고를 제2부로, 그리고 1943년 일본 文部省 주최로 도쿄에서 열린 일본제학연구대회에서 발표한 연구논문 「조선탑파의 양식변천」을 제3부로 구성했다.
하권인 제4권 『朝鮮塔婆의 硏究』 下는 모두 일문으로 씌어진 미발표 각론으로, 별세에 이르기까지 완성도 높게 집필한, 한국 탑의 양식과 변천을 대표하는 탑파 38基에 관한 각론을 제1부로, 그 밖의 草稿에 가까운 각론 68편을 제2부로 구성했다. 더불어, 연구와 함께 소장해 오던 당시의 탑 사진자료, 도면 및 스케치 자료도 함께 실었다.
이 두 권으로 우리는 명실공히 ‘조선탑파의 연구 결정판’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고유섭은 1930년대초 미학연구실 조교시절부터 전국 각지에 산재되어 있던 탑 유적을 찾아다니며 세밀한 관찰과 실측을 하고 관련 사진자료를 모았으며, 고문헌 및 일본인 학자들의 연구논문들을 섭렵하여 체계있게 연구를 진행했는데, 명쾌한 양식론과 문헌연구로써 이전의 일본 관학자들이 우리 탑에 대해 추측한 연대나 시대양식을 수정하고 반론을 제시했으며, 그간의 자료 나열적인 미술사 서술을 극복해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방법론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현존하는 불교문화재 중 수적으로 가장 많은 탑에 관한 완성도 높은 연구서로, 그의 모든 저작 중에서 우리 미술사를 바라보는 혜안과 깊은 통찰력이 단연 돋보이는 역작이다.
제5권 『高麗靑瓷』는 고유섭 생전에 이루어진 최초이자 마지막 출판물로, 오랜 역사 동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술품으로 여겨지던 고려청자에 관해 우리나라 학자가 쓴 체계적인 개론서이다. 청자란 무엇인가 하는 정의에서부터, 청자라는 명칭과 그 의미를 살피고, 청자의 종류와 변천과정, 窯址와 출토지역에 관해 고찰한다. 고유섭은 고려문화의 중심지에 위치한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하면서, 필연적으로 고려의 공예미술에 큰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당시 일본학자들에 의해 고려청자 또는 조선백자에 관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고유섭은 이들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되 문헌기록과 유물의 세심한 고찰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세계적인 공예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고려청자에 관한 애정어린 연구로 결실맺어진 이 책 역시, 이후 많은 미술사학자들의 청자 연구에 초석으로 자리매김되어 왔다.
제6권 『朝鮮建築美術史 草稿』는 고유섭이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던 1930년대 후반경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발표 유고로, 비록 초고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씌어진 최초의 건축 通史이다. 조선건축의 지위, 史的 분류, 특징 등을 서술한 총론을 시작으로 상고시대,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 대한시대까지를 通觀하고 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 시대 건축의 주된 형식과 그 특징을 중심으로 밝혀 나감으로써 우리 건축사의 주요 면면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식민사관에 입각한 일본 학자들의 조선건축사를 극복할 미학적 기초를 마련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으며, 현재 우리의 건축사가 이 내용을 토대로 정립되었다는 점에서도 한국건축사의 근간을 이루는 소중한 문헌이다.
제7권 『松都의 古蹟』은 고유섭이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재직하던 1930년대, 개성 일대의 유적들을 답사와 실측을 통해 조사하고 관련 문헌자료를 고증하여 완성한 고려문화에 관한 기초 연구의 하나로, 생전에 출판을 위해 탈고를 마쳤으나 사후에 초판 발행되었으며, 이후 열화당(1977)과 통문관(1993)에서 각각 재발간되었던 책이다. 새롭게 선보이는 『송도의 고적』은 1946년 초판본에 실렸던 서른세 편의 글에, 초판본에서는 제외되었지만 개성과 관련되는 글 다섯 편을 부록으로 덧붙여 엮었다.
이제 제8권 『又玄의 美學과 美術評論』, 제9권 『朝鮮金石學』, 제10권 『又玄散文』의 출간, 즉 ‘우현 고유섭 전집’의 완간을 앞두고 있다.

16. 세계 여러 도시의 주거문화 탐구, ‘住居로 읽는 역사도시의 기억들’

이 시리즈는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세계의 열네 개 역사도시를 대상으로 각 도시의 공간구조와 그 속에 자리잡은 주거의 형태와 양식, 변천 과정을 면밀히 탐구함으로써 그곳의 인문・지리적 환경이 사람들의 주거와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보는 시리즈다.
『도시주거 형성의 역사』 『북경의 주택』 『넓게 본 중국의 주택』 『깊게 본 중국의 주택』 등의 저서를 출간하면서 오랜 기간 도시와 주거환경 연구에 매진해 온 저자 손세관은, 이 시리즈를 통해 열네 개 역사도시의 도시조직과 주거유형을 탐구해 간다. 선정된 도시들은 모두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잘 간직하면서 충분한 연구가치를 지닌 곳들이며, 세월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해 온 과정이 도시의 주거환경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어서 그 도시만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서양 문화권에서 피렌체, 베네치아, 파리, 런던, 뉴욕을 선정해 다섯 권으로, 동양 문화권에서는 북경(北京)과 소주(蘇州), 교토와 도쿄, 이슬람의 페스와 튀니스, 인도의 자이푸르와 아마다바드, 그리고 서울을 선정해 다섯 권으로, 모두 열 권으로 이 시리즈를 완성할 계획이다.
이 시리즈는 보통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일구어 왔던 ‘주거’에 초점을 맞추어 도시의 변화 과정을 살피며, 도시를 구성하는 구조물들의 특성과 시민들의 생활양식을 함께 파악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는 오늘날 고도로 집합화하고 기능화한 주거환경 속에서 삶을 꾸려 나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역사적 지리적 특성에 알맞은 주거형태는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즉 우리의 눈으로 세계의 도시주거를 간취함으로써 일차적으로는 도시와 주거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파악하고, 나아가 다시 우리의 모습에 되비춰 봄으로써 바람직한 주거문화를 가꾸어 나가는 데 이 시리즈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시리즈의 첫 권인 『피렌체』는 도시가 처음 형성된 기원전 200년경부터 근대로 접어들기까지 피렌체의 공간구조가 어떻게 변화 발전해 왔는지 들여다보고, 상류층의 팔라초와 중산층의 상인주택, 그리고 서민주택 등 여러 계층의 주거양식을 살펴본다. 특히 이 책에서는 서민주거지역에 자리잡은 중산층과 서민층의 주택에 무게를 두어 서술하고 있는데, 스키에라형 주택과 리네아형 주택 등의 주거형식을 사례로 들어 서민들이 일구어 나간 신흥 주거지의 환경을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피렌체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역사와 문화의 도시로 알려진 베네치아는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자연환경 속에서 오랜 기간 번영을 누려 왔다. 『베네치아』에서는 바다와 운하라는 자연환경과 긴밀하게 연계하면서 서서히 성장과 변화를 반복해 온 이곳을 미로처럼 연속되는 유기적 도시의 전형을 보여주며, 인위적으로 계획된 도시들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드러내고 있다. 몇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작고 보잘것없던 정주지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세도시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한 채 서서히 오늘날의 모습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베네치아인들의 탁월한 공간운용 방식과 유연성을 배울 수 있다.